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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식이란? 건강이나 좋은 식품은 없다

식품은 문화이다
- 공짜 점심은 없다
- 문화이다 = 이유가 있다
- 무엇이 전통식품인가 ?
- 음식에서 다양성의 의미

먹어야 산다. 광합성을 통해 스스로 에너지원을 만들지 못하는 동물은 먹어야 살 수 있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적절히 먹어야 하고, 엉터리로 먹어서는 건강할 수 없다
그런데 좋은 음식이란 무엇일까

약식동원,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
과거에 음식에 대한 ... 지금은 오히려 부작용이 많다

조한경씨는 의사는 “수련과정 10년 중에 영양학에 대해서는 보통 한 시간, 많으면 두 시간, 심하면 0시간에 불과하다. 의대에서는 자연물질이나 비타민, 미네랄의 약리작용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전혀 없다. 그래서 그것이 쓸데없다고 하거나 먹지 말라고 조언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본인은 의사가운과 청진기를 목에 건 사진을 내세우고 ‘환자 입장에서 가장 확실한 건강보험은 올바른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하며 음식과 영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식품으로 병을 고친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 건강이 나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좋은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믿음 때문에 실제로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체중, 운동, 술, 담배 같은 것을 등한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좋은 음식이라는 것이 정말 건강에 좋은 음식일까. 사실 건강이라는 개념마저 200년도 안 된 근대적 불완전한 발명품이라고 한다.
한양대 의대 신영전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이전 한반도에 ‘건강’(健康)이란 단어조차 없었다고 한다. 미병(未病), 장수(長壽), 양생(養生) 등의 단어가 사용됐지만, 그것은 지금의 건강과 의미가 다르고 ‘건강’이란 단어는 19세기 중반 네덜란드 의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오가타 고안 등이 만들어 낸 단어라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well-being)한 상태”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완전히’란 단어도 문제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한 상태’를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없고 인류 역사상 존재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불완전하게 살다가 죽는다. 그렇다고 불완전하게 온존한 또는 90% 온존한 상태라고 할 수도 없다. 무지개가 멀리서는 선명하지만 다가가면 없어지는 것처럼 건강에 대한 개념도 모호하고 좋은 식품이란 개념도 모호하다.
식당 메뉴마다 이 음식은 어디에 좋고 저 음식은 어디에 좋다는 설명이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몸에 좋다는 식재료의 좋은 성분을 골라 만든 것이 건강기능성 식품이다. 그런데 누구도 건강기능성 식품만 골라 먹는다고 건강해진다고 하지 않는다.  누구나 좋은 식품을 말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한다. 좋은 영양이 풍부한 식품이라면 그 영양분은 정확히 무엇이고 이상적인 함량은 얼마일까? 칼로리가 평균이 좋을까 적은 수록 좋을까?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이상적인 비율은 얼마이고 비타민, 미네랄은 많을수록 좋을까? 그런데 비타민과 미네랄이 많은 것만 골라 먹으면 어떻게 될까? 사실 영양성분을 가장 이성적으로 갖춘 것이 사료이다. 식품에서 이상적인 영양분을 추구하다보면 음식은 사료의 형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제 입맛이나 편의대로 좋은 식품을 판단하면서 시중에는 좋은 식품이 넘치고 나쁜 음식도 넘치게 되었다. 어느 순간에 음식이 약이 되고 독이 되었다. 그래서 음식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되었고 음식으로 치료되지 않는 질병 또한 없다고 한다. 그럼 영양학자가 최고의 의사가 되어야 할 텐데, 방송에서는 식품과 영양을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은 의사나 한의사가 판관이 되었다. 그리고 카이로프랙터는 자신들이 최고의 전문가인양 식품을 평가한다.
하지만 좋은 식품도 관념이 만든 허상일 뿐이다. 식품은 다양한 분자의 조합일 뿐이고, 우리 몸에 소화 흡수되어 에너지원이 되거나 우리 몸을 구성하거나 대사과정의 부품이 된다. 식품의 의미와 역할은 내 몸이 부여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특별한 기능을 하는 물질은 없다. 영양분이란 모자라는 사람한테는 좋은 것이지 넘치는 사람에게도 좋은 것은 없다. 누가 몸에 좋다 하니 무작정 자신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기대나 많이 먹을수록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한 착각이다. 극소량 필요한 비타민과 미네랄은 한 수저 먹는다면 치명적이 되기 쉽다.
좋은 식품의 기본조건은 독이 되는 성분이 없어야 할 텐데, 첨가물은 식품에 첨가해도 문제가 없는 물질이라 첨가물이지 독이 되는 성분이 아니다. 비타민, 미네랄, 아미노산, 항산화제, 심지어 산소마저 식품에 첨가될 때는 첨가물로 관리된다. 좋은 식품과 건강이란 말이 넘칠수록 인간은 더 나약해지고 아프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건강에 지나친 관심이 새로운 질병명을 만들고 내고 의료비도 늘어난다. 완벽한 건강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초라해지며 마침내 죽음으로 최종 실패자가 된다.
카이로프랙틱의 천국은 미국이다. 미국의 백화점이나 쇼핑몰에는 건강식품 판매대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세상의 영양보충에의 20%가 미국에서 판매되고, 유기농의 40%가 미국에서 판매된다. 지금보다 소위 좋은 식품이 더 많이 팔린다고 더 건강해질 것 같지 않다.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인식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 한반도에 ‘건강’(健康)은 없었다. 그런 단어가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병(未病), 장수(長壽), 양생(養生) 등의 단어가 사용됐지만, 이들은 지금 우리가 ‘건강’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건강’이란 단어는 19세기 중반 네덜란드 의학(난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오가타 고안 등 일본 난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건강’은 일본 의학계의 서양의학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200년도 안 된 근대적 발명품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제 현대인들은 ‘건강’을 영어의 ‘health’(헬스), 독일어의 ‘Gesundheit’(게준트하이트)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 헌장에서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well-being)한 상태”라고 규정했다. 이 정의는 건강에 ‘사회적 온존’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정의지만, 정의 중 ‘완전’이란 단어 때문에 지속적인 비판을 받아오고 있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온존한 상태’를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없고 인류 역사상 존재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불완전하게 살다 종국에는 죽는다. 그런 점에서 세계보건기구의 건강의 정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본질인 불완전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 완벽함에 대한 지향은 ‘우생학적 강박’과 깊은 친화성을 가지며 결함을 가진 자로 만든다. 또한 ‘건강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기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질병,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차별하고 낙인찍는다.
완벽함을 지향하는 건강은 신화일 뿐이다. 그런 신화가 가장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는 곳이 한국 사회다. 식당 메뉴마다 이 음식이 심장에 좋으니, 간장에 좋으니 하는 설명이 붙어 있고, 목욕탕에도 혈압에 좋으니 당뇨병에 좋으니 하는 설명이 빠지지 않는다. ‘완벽한 얼굴과 몸매’로 변신하라는 광고가 지하철 칸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래서인지 성형외과술이 가장 성황을 이루는 곳도 한국이다. 우리 영혼을 침식하고 있는 소위 ‘완벽한 몸 만들기 프로젝트’는 우생론의 현대적 발현일 뿐이다.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병적 현상이며 무너짐이 예정된 바벨탑 쌓기다.
건강이란 말이 범람하고 건강 산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나약해지고 아프다. 이른바 ‘건강의 패러독스’다. 영리적 의료산업은 매일 새로운 질병명을 양산해 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그럴수록 내 건강검진 결과지에 써지는 병명 수도 늘어나고 의료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건강한 신체의 추구는, 과거 국민국가의 등장에 따른 대의명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정치·경제적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더 나아가 기업이 앞장서고 국가가 밀어주는 의료산업이란 이름으로 우리 몸을 빠르게 점령해 가고 있다. 오늘날 주요 병원체는 건강한 신체를 추구하는 그 자체이며 의료산업은 병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몸을 다시 구성하고 있다는 이반 일리치의 예언적 설명은 한국 사회에서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
오해 말자. 건강이 없다고 고통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건강’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에 강박적으로 집중하기보다 우리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공동의 인식 위에서 개인과 사회의 삶을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과 질병 역시 무조건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50대 중반부터 한쪽 뺨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종양을 치료하지 않고 살다 갔는데, 이런 신념을 따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그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개인과 인류의 긍정적 변화는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환자들은 병든 것이 아니라 늙은 것이다”라는 의학박사 구트의 말도 의미가 있다.
완벽한 건강을 추종할 때, 질병은, 장애는, 늙음은 ‘부담’으로 전락하고 인간은 초라해지며 마침내 죽음으로써 모두 실패자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적 당위는 ‘완벽한’ 건강이나 질병과 장애의 ‘박멸’이 아니라 본질적 불완전성과 함께 ‘온존’하기 위한 존재들의 끝없는 연대가 돼야 한다. 건강은 없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3443.html?fbclid=IwAR0jxUNDu09aDdXQIh2HdehP4N_bSCvwAGpT_E0PCFa7lnHMZraT7hDpFwQ#csidx9eab3cce767759fb9225f4d0d8d7239

  


페이스북       방명록      수정 2019-10-21 / 등록 2010-02-01 / 조회 : 3951 (123)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불량지식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  2009.12  최낙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