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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침




1999-11-6 한빛내과 홈페이지  

지난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행했던 것 몇가지를 꼽으라면 그 중에는 수지침도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좀 시들해진 것 같지만 한때는 수지침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주 많아서 주부교양강좌를 개설할 때마다 수지침교실이 끼어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수지침이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나름의 성공을 거둔 데에는 많은 요인이 작용할 것 같습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질병을 치료하여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소개하여 많은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것입니다.

기원전에 히포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이 약간씩은 의사의 기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런 의사의 기질을 효과적으로 자극하는 데 성공한 것이 수지침이 유행한 요인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의사와 한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는데 간단히 배워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다른 사람을 치료해줄 수도 있다니 많은 사람의 의사가 되고 싶은 본능을 자극하고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공통으로 가진 속성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사람들은 병들고 약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본능처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속성은 네안데르탈인에서는 볼 수 없지만 현생인류인 크로마뇽인 때부터 나타난 인류의 오랜 전통입니다. 요즈음에도 양로원이나 노인 정 같은 곳에 수지침을 시술했다는 기사가 나기도 하고 그런 행동으로 시장이나 구청장의 표창을 받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수지침이 유행한 원인으로 그것이 간단하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수지침은 손가락의 각 부위에 신체의 장기를 대칭시키고, 어느 부위에 이상이 있으면 이곳, 어느 부위에 이런 증상이 있으면 저곳, 하는 식으로 증상이나 장기와 시술부위를 1:1로 대응시키는 매우 간단한 체계로 되어 있어 설명하기 쉽고, 배우기 쉽고, 기억하기 쉽고, 시술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높은 지식수준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많은 사람이 접근하기 쉬운 것도 유행의 한 요인으로 보입니다.

시술부위가 손가락이라는 것도 유행의 한 요인일 것입니다. 아무리 가는 침으로 찌른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몸에 바늘을 찌르는 것에 대하여 공포를 느낍니다. 공포를 느끼는 정도는 찌르는 부위에 따라 다른데 가슴이나 배와 같은 몸통이나 얼굴이나 목과 같은 부위에 바늘을 찌를 때에는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 공보가 비교적 덜한 사지, 그 중에서도 맨 끝부분에 해당하는 손가락을 시술의 대상으로 택하여 시술에 대한 공포를 줄인 것도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의학적으로 본다면 손가락에는 복잡한 구조물이 적어 심각한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이 다른 곳보다 덜 하다는 점도 손가락을 시술부위로 택했을 때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수지침이 유행한 데에는 그것이 등장한 시기의 절묘함도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한참 경기가 좋고 국민소득이 증가하여 이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고 사람들이 건강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에 수지침이 등장하였습니다. 만약 수지침이 그보다 빨리 소개되었더라면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요소가 모두 갖춰졌다 하더라고 수지침을 배우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면 배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지침을 배우고 시술하는 데는 책 한권, 약간의 강사료, 그리고 침 한 세트면 충분합니다. 즉 수지침에 들어가는 비용이 저렴한 것입니다. 상업적인 용어를 쓴다면 박리다매의 형식을 취하여 많은 사람에게 유행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OOO 머리핀이니 XXX 머리띠니 하여 많은 여성에게 유행하는 것이 대부분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것을 생각하면 수지침이 널리 유행한 요인에는 비용도 한몫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날 우연히 타블로이드판(주간 사건과 진실, 일요뉴스 등과 같은 크기와 형식의) 간행물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건강을 주제로 다루는 간행물이었는데 일간인지 아니면 주간인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현대의학에 관한 글과 동양의학에 관한 글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다음으로 비중있게 다룬 것이 수지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간행물 전체를 꼼꼼히 살펴보니 수지침과 관련된 단체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곳에서 펴내는 간행물이었습니다. 수지침과 직접적인 관계는 내세우지 않으면서 수지침을 비중있게 다루어서 다른 민간요법과 차별화하는 방법은 마치 객관적인 3자의 평가처럼 보입니다. 이런 방법은 수지침을 직접 선전하는 것보다 위상을 높이는 데 보다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수지침을 개발했다는 사람이 면허가 없으면서 의료행위를 했다고 법정에 선 적이 있습니다. 그때 판결이 재미있게 났는데 수지침은 한의학이 아니므로 한의사 면허가 없이 수지침을 시술했다고 해서 무면허 의료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저는 그 판결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지침이 한의학과 관련이 있건 없건 그것이 의료행위인 것은 분명하고 그 사람은 의료인이 아니므로 면허 없이 의료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지침은 한의학과 비슷한 방법론을 사용합니다. 동양의학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침을 시술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그렇고 동양의학체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몸의 각부분과 신체장기의 1:1 대응의 논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의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동양의학적인 방법론을 택하면서도 한의학과 관련이 없다고 독창성을 주장하는 것은 우선 위의 재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무면허 의료행위로 법의 제재를 받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잇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지침이 한의학의 한 부류쯤으로 여겨진다면 한의사들이 수지침에 관여하게 되고 이론과 신뢰도에서 한의사들에게 밀려 한의학에 흡수되거나 없어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에 수지침이 한의학과 별개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는데 꼭 필요한 주장입니다.

의학을 전공하다보니 수지침이 효과가 있는 지 없는 지 제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런 것에 대하여 답하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선 내과에 와서 수지침을 맞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수지침을 맞았지만 나아지지 않아' 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과의사로서는 수지침을 맞았지만 나아지지 않는 경우만 대하므로 수지침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수지침을 맞고 나아진 사람은 진료를 받으러 오지 않기 때문에 수지침을 맞은 사람중에 효과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비율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지침을 맞고 나아졌더라도 그것이 모두 수지침의 효과 덕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수지침을 맞고 나아졌는데 그것이 수지침의 효과 때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분이 계실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어떤 치료법에 대해서나 적용되는 것으로 현대의학의 치료법에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즉 병원에서 감기약 한봉 먹자마자 감기가 뚝 떨어졌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이 감기약 한봉의 효과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기가 뚝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우연히 그 바로 전에 약을 먹었을 수도 있고, 약 덕택에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든 병은 치료하지 않으면 진행되는 자연경과가 있고 자연경과중에는 좋아지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가벼운 병일수록 저절로 좋아지는 일이 많습니다.

수지침의 경우에도 저절로 좋아질 것을 수지침을 맞은 경우가 있고 수지침의 덕분에 좋아진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수지침이 효과가 있는가 여부는 수지침을 맞고 좋아지는 경우가 자연경과에 의해 좋아지는 경우보다 얼마나 많은가인데 대개의 민간요법이 그런 비교자료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지침을 하는 사람이 수지침의 부작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시술부위가 손가락이어서 큰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은 적어보입니다. 외과의사는 혹시 화농성 관절염, 골수염, 농양과 같은 감염에 의한 부작용을 우려할 지 모르겠지만 내과의사의 입장에서 걱정되는 것은 피를 통하여 옮는 병입니다.

침을 제대로 소독하지 않으면 피를 통해서 병이 옮을 수 있는데 수지침에 사용하는 침을 한번만 사용하고 버리는 것 같지 않아 병이 옮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옮을 수 있는 병중에 에이즈, 매독, 말라리아와 같은 것은 비교적 흔하지 않아 위험성이 별로 없겠지만 B형 간염이나 C형 간염은 우리나라에 비교적 흔해서 제대로 소독되지 않은 침을 통하여 옮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걱정은 수지침이 효과가 좋다면 그 부작용 또한 클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릇 효과가 좋은 방법은 모두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부작용 또한 그만큼 뚜렷합니다. 손가락의 어느 한 부위를 자극해서 몸의 다른 부위에서 뚜렷한 작용이 나타난다면 그곳을 불필요하게, 또는 실수로 자극했을 때에도 그곳에서 뚜렷한 작용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이 몸에 해롭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심각한 부작용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방법은 그것을 잘못 사용해도 부작용 또한 심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수지침은 효과는 뚜렷하지만 부작용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제 생각은 '글쎄.... 그럴 수 있을까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