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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 번역: 전공자에게 맡겨야 할까, 전업 번역가에게 맡겨야 할까?
노승영/번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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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일에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인 황현산 선생이 이런 트윗을 올렸다.

전공자가 번역을 더 잘 할 것이라는 생각도 미신에 속한다. 전공자는 전공하는 작가나 작품에 대해 지식과 정보는 많다. 그러나 번역도 글쓰기인데 전공자가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은 아니다. 좋은 번역을 위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그의 임무다.

(출처: https://twitter.com/septuor1/status/539620842246647809)

나는 분야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 번역가이지만 요즘 들어 과학책 번역이 부쩍 늘었다. 과학책은 무엇이든 배울 것이 있고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어서 번역할 때마다 즐겁다. 그런데 내가 전공하지 않은 분야의 책을 번역할 때면 ‘내가 이 책을 번역해도 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나의 학부 전공은 영어영문학이고―부전공은 언어학―대학원 전공은 인지과학이다.) 비전공자로서 과학책을 번역할 때면 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무엇보다 학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몰라서 엉뚱하게 번역할까봐 조마조마하다. 개념이 이해되지 않아서 애를 먹기도 한다. 전공자가 학부 때 배웠을 개념을 몰라서 교과서를 찾아볼 때면, 마치 바퀴를 재발명하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비전공자인 전업 번역가로서 과학책을 번역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변명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전공자가 번역해야 하는 이유

텍스트는 컨텍스트를 전제하고 지식은 배경지식을 전제한다.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 있어도, 문장 전체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과학책은 개념과 용어를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다. 공리에서 결론에 이르는 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의 이해 수준은 결론만 간신히 알아듣는 사람과 결코 같지 않다. 비전공자인 전업 번역가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번역하면 기계적 직역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번역문은 한국어로 쓰였으되, 또한 한국어 어법에 맞게 쓰였으되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암호문이기 십상이다. 이것이 전업 번역가의 아킬레스건일 것이다.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 2014)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작가들은 이따금 글쓰기를 그림 그리기에 비유한다. 단어는 한 번의 붓놀림에 해당한다. 화가가 붓질을 한 번 또 한 번 해 나가듯 작가는 단어를 하나 또 하나 덧붙여 가면서 진짜배기 삶의 온갖 깊이와 생동감을 담아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 작가가 하는 일은 채색이 아니라 소묘다. …… 솜씨 좋게 소묘를 그려 내고는 여백을 채울 실마리를 독자에게 던져 준다. 색깔, 명암, 질감 등 장면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정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25쪽) 저자는 머릿속에 담긴 이미지의 일부만을 독자에게 보여주며 독자는 이를 바탕으로 원래 이미지를 재구성한다(‘원래’라는 말은 재구성 행위를 일컬을 뿐 저자의 이미지와 독자의 이미지가 같음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독자는 이 소묘만을 단서 삼아 자신의 배경지식을 적용하면 그만이지만, 번역자는 새로운 소묘를 그려내야 하는데 이 소묘가 저자의 소묘와 같은 효과를 내야 한다(즉, 독자가 저자의 소묘를 볼 때와 번역자의 소묘를 볼 때 똑같은 이미지를 재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저자가 그리지 않은 것까지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저자의 주장 A가 (제시되지 않은) 다른 주장 B를 논박하기 위한 것이라면 번역자는 주장 B를 이해해야 A를 자신의 소묘로 독자에게 제시할 수 있다. 전공자는 이미 주장 B를 알고 있을 테지만 비전공자인 번역자는 주장 B를 이해하기는커녕 이런 주장이 있는지조차 모를 가능성이 있다.

용어의 번역은 또 다른 문제다. 학계에는 특정 용어의 번역어가 정착되어 있고 전공자들은 이런 번역어에 친숙하지만 전업 번역가는 이미 정착된 용어를 엉뚱하게 번역할 우려가 있다. 그나마 원어를 병기했으면 다행이지만, 그러지도 않았다면 그 기표는 기의와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전업 번역가도 할 말이 있다. 해당 분야의 교과서적 기본서들, 즉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책이 (전공자의 손에)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곧장 대중서를 번역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한국어의 지식 생태계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자체를 만들어내야 하는 처지에 빠진다. 물론 의학용어집처럼 번역어가 이미 정착되었고 이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도 검색을 게을리하여 엉뚱하게 번역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만, 학계에서 쓰는 번역어가 어려운 한자어이거나 부절적한 표현이라면 새로운 번역어를 제안하는 일종의 언어적 실천을 시도할 수 있다. 개념의 의미를 충분히 소화하여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한국어의 체계에―또한 한국어로 된 기존의 지식 체계에―잘 들어맞는 한국어로 풀어내는 것은 어떤 면에서 번역가의 의무이자 권리다. 비록 현실은 책마다, 번역자마다 번역어가 달라서 용어가 통일되지 못한 탓에 아예 원어가 통용될 때도 있지만 말이다. 번역어를 정하는 것은 (한국어만 놓고 보자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이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가 일종의 학문 활동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계와 번역계가 활발히 의견을 주고받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학계가 심판자의 역할과 더불어 적극적인 조언자의 역할을 한다면 대중과의 간격을 더욱 좁힐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전업 번역가가 번역해야 하는 이유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이유는 번역 속도다. 이건 두말할 필요 없는 전업 번역가의 장점이다. 두꺼운 책을 두 달, 석 달 만에 다 번역했다고 하면 학계에 있는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면서 간간이 짬을 내어 번역하다 보면 1년은 예사이고 몇 년을 끌기 일쑤이니 말이다. 하지만 전업 번역가는 하루 여덟 시간 이상을 오로지 번역에만 쏟는다. 절대적 시간을 따지면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번역 속도가 빠르기로 소문난 모 번역가의 책이 술술 읽히는 데는 그런 까닭도 있다. 속도와 정확성이 반비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무를 보아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숲을 보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물론 문장을 몇 번씩 곱씹으며 깊이 이해해야 하는 심오한 책도 있지만, 요즘 나오는 대중서는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해 쉽고 명쾌하게 쓰거나 편집하는 추세인 듯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전공자의 가장 큰 약점은 이른바 ‘지식의 저주’다. 칩 히스와 댄 히스의 『스틱!』(엘도라도, 2009)에서는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뉴턴의 1990년 실험을 소개하는데, 피험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1번 집단)은 노래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도록 하고 다른 집단(2번 집단)은 노래 제목을 맞히도록 했다. 2번 집단은 120곡 중에서 2.5퍼센트인 세 곡밖에 맞히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1번 집단에 상대방이 노래 제목을 맞힐 확률을 물었더니 50퍼센트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테이블을 두드리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기에 상대방도 그 노래를 듣고 있을 거라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이걸 모를 수가 있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듣는 사람의 막막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전공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독자에게는 지극히 생소할 수 있음을 감안하지 못한다. 전공 공부란 암호 해독술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일반인은 감도 잡지 못하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내용을 파악하고 행간을 읽어내는 기술을 습득한다.

전공자의 글이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인지 부하가 크기 때문이다. 인간의 단기 기억은 용량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문장을 덩어리로 나누어 처리한다. (통사론 용어를 쓰자면) 트리 구조에서 작은 트리를 완성해가면서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트리는 독자의 단기 기억을 점유하기 때문에, 안은문장을 길게 쓰면 앞에 나온 단어를 잊어버려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문장을 ‘정원산책로garden path 문장’이라 한다. (스티븐 핑커, 『언어본능』(동녘사이언스, 2013) 7장 ‘말하는 머리들’ 참고.) 논문은 엄밀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용어와 표현을 한정하다 보면 문장이 덕지덕지 길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글을 읽고 쓰는 데 익숙해지면 그러지 못한 일반 독자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전공자는 (시쳇말로) ‘개떡같이 써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래서 전공자는 독자와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이를테면 독자에게 생소한 단어에 역자주를 달지 않고 넘어간다거나.) 그런데 여기에는 심리적으로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 연구자들의 모임에서 쉬운 개념을 꼬치꼬치 설명하는 것은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와 생각도구Intuition Pumps and Other Tools for Thinking』(동아시아, 근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전문가가 전문가에게 이야기할 때―분야가 같든 다르든―저지르는 실수는 설명을 덜 한다는 것이다. 더 설명하는 실수는 결코 저지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동료 전문가에게 무언가를 꼬치꼬치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를테면 “혹시 철자를 불러드려야 하나요?”)을 가하는 것이다. 동료 전문가를 모욕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설명을 더 하기보다는 덜 하는 것이 안전하다.”

하물며 전업 번역가도 독자가 모르는 지식, 즉 원문에 대한 지식의 저주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전공자는 두 겹의 저주에 빠지는 셈이다. 동료 연구자를 대상 독자로 간주하는 논문을 주로 쓰다가 일반인을 대상 독자로 삼는 대중서를 번역하려면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몰랐던 것을 알아내기가 힘들다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머릿속의 지식은 하나하나가 아귀가 맞도록 배열되어 있기에, 개념 하나를 체계에서 빼려면 나머지 파라미터를 모두 조정해야 한다. 쉽게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 과학 대중서는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동원한다. 만일 대중문화의 장치나 언어적 장치(이를테면 말장난)를 동원한다면 전공자가 반드시 더 정확하게 해석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번역 경험을 많이 쌓은 전업 번역가가 저자의 의도를 더 올바르게 파악하여 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 대중서는 과학만 전달하지 않는다. 책에 담긴 재미와 감동을 전달하지 못하면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할 것이다.

서두에서 텍스트는 컨텍스트를 전제한다고 했는데, 과학책이 전제하는 컨텍스트는 과학적 배경지식만이 아니다. 사회·문화적 배경지식이 과학적 컨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과학 대중서를 번역하려면 전공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것과 더불어 폭넓은 교양을 쌓아두어야 한다. 전업 번역가가 반드시 교양이 더 많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책을 접하는 것이 그의 업이니만큼 조금이나마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번역해야 할까?

글솜씨와 폭넓은 교양과 전공 실력을 겸비한 전공자가 있으면 이상적이겠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번역을 맡기기는 더더욱 힘들다. 차선책으로 전업 번역가가 일단 번역하고 전공자가 감수를 맡는 방법을 많이 쓰는데, 나도 이런 식으로 몇 권을 작업했다. 일반인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쓴 대중서라면 경우에 따라 전업 번역가 혼자서도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범위를 넓혀서 바라보자면, 전공자가 자기 분야의 주저를 번역하면서 개념을 정리하고 용어의 올바른 번역을 제시한 뒤에 전업 번역가가 대중서를 가독성 높게 번역하는 분업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논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전공자와 전업 번역가의 차이를 다소 과장했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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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찬님의 과학번역 7대 정석


1. 번역은 영어실력이 아니라, 국어실력으로 하는 것이다.
-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라.
- 한자(漢字) 공부 필수: 한자 모르면 번역 못한다.

2. 읽히지 않는 번역은 번역이 아니다.
- 개나 소나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reader-friendly).
- 동료는 물론, (가능하면) 비전공자도 읽을 수 있게

3. 사전(辭典)보다는 감(感)에 의지하라
- 번역은 별도의 문학 장르다
- 사전을 보면 절대로 좋은 글이 안 나온다(단, 내공 필수)
- 단어에 집착하면 흐름을 놓친다(단, 전문용어는 예외)

4. 원문에 오류가 있으면 당연히 고쳐야 한다
- 활자의 힘에 현혹되지 말라 - 원문이 틀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 내용이 틀리면 욕먹는 건 원저자가 아니라 번역가다
- 끊임없이 배경지식을 쌓아야 하는 이유: 모르면 못 고친다

5. 과학 번역은 해석이 아니라 해설이다
- 내용을 완벽히 소화하지 못했으면 번역하지 말라
- 필요하면 사족, 단락구분, 번호, 따옴표 등도 추가하라
- 기승전결이 없는 문장은 접속사 추가

6. 최고의 번역은 번역한 티가 안 나게 하는 것이다(天衣無縫)
- 시치미 뚝: 출처를 밝히기 전까지는 마치 내 글인 것처럼

7. 책 한 권을 번역한 후에는 그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어야 한다
- 10년의 법칙: 한 분야 번역 10년이면 박사학위 소지자와 의사소통 가능
- 10대 1의 법칙: 원서 한 권을 번역하려면 관련도서 10권은 읽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