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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問津): 진정한 융합을 향한 길

- 지식의 융합(link, mapping)이 필요성
- 지식의 융합(link, mapping)이 어려운 이유
- 지식의 융합(link, mapping)의 방법 : 통찰력+ IT

- 지식의 융합 사례
- 잡종 hybrid, 박쥐, 짬뽕, 회색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고려대 융합문명연구원 2011/09/16]
  
‘융합’(融合)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로 자리를 잡았다. 무엇이나 서로 합치기만 하면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야단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분열과 갈등이 효율만 추구하던 압축 성장의 과정에서 고착화된 극심한 분화와 단절에서 비롯되면서 융합이 최선의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기술의 ‘융복합’(convergence)이 미래를 위한 유일한 전략이고, ‘통섭’(統攝)과 융합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심지어 초중등 교육에서도 과학, 기술, 예술, 수학을 융합시켜야 한다는 STEAM이 대세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무작정 융합을 한다고 새로운 분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유성 생식의 과정에서도 성공적인 수정의 확률은 지극히 낮은 것처럼 학문의 융합을 위한 시도에서도 성공 확률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융합되는 분야에 대한 최고 수준의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성공적인 융합이 가능하다. 결국 새로운 분화를 지향하는 높은 수준의 융합은 선진 사회와 최고 수준에 있는 전문가의 몫일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낮은 수준의 융합도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고착화된 과도하고 불합리한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융합이 그런 것이다. ‘문과’와 ‘이과’로 대변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심각한 단절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과 성향의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문학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문학적 성향의 사람들은 현대 과학과 기술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차별적인 융합의 열풍이 휩쓸려 자칫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담을 해체해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높이의 담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융합은 정체성 확립과 소통이다. 다양한 사상과 지식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나루터를 찾아가는 ‘문진’(問津)의 정신이 진정한 융합의 길이다.


1. 들어가기

이제 우리 사회에서 융합은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심각한 분열과 갈등에 의한 소통의 단절이 그동안의 과도한 분화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이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학문 영역이 너무 잘게 갈라지는 것이 결국에는 발달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지나치게 갈라진 학문 영역을 서로 합쳐야만 새로운 발전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지나치게 좁고 깊은 것’을 경계하고 ‘얕지만 넓은 것’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융합의 물결이 단순한 유행의 수준을 넘어서 교육, 연구, 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 초중등 교육에서도 ‘과학’, ‘기술’, ‘예술’, ‘수학’을 융합시켜야 한다는 ‘STEAM’이 강조되고 있다.

융합이 효율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70년대에 일상용품에서 플랜트 설계에 이르는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취급하여 우리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종합상사’의 등장이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우리는 과도한 융합이 오히려 효율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경험했다.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종합상사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전문화된 기업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 그 결과였다.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종합상사보다는 제한된 분야에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는 전문화된 기업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모든 것을 무작정 융합시켜서 하나로 만들기만 하면 단절의 문제가 해결되고, 소통이 원활해지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융합을 통해서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어야 하고, 융합을 실천하는 현실적인 방법론도 찾아내야 한다. 융합의 한계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융합의 필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겉으로만 그럴듯한 형식적인 만남을 융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2. 융복합과 융합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융합’의 진정한 의미는 매우 혼란스럽다. 진화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에 제창했던 ‘통섭’(統攝, consilience)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통섭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한 것이 사실이다. 기술의 융복합(convergence)와 인문학, 자연과학, 예술의 융합(fusion)도 자주 등장한다.

1) 공학 영역의 확장을 위한 융복합

‘융복합’은 20세기 말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로봇 공학이나 감성공학 등에서 나타난 새로운 경향이다. 융복합은 새로운 제품과 기술을 개발하는 공학 분야에서 인문학의 전유물로 여겨왔던 인간의 감성적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소비자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고려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기술 개발에서의 인문학의 역할은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제한적인 역할에 머무를 뿐이지 기술 개발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 결국 공학적 효율의 획기적인 도약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기술의 ‘융복합’(convergence)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인터넷, 디지털카메라, MP3를 융합한 스마트폰이 기술 융복합의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다. 기술의 융복합은 단순한 공정의 효율 극대화는 물론이고 전혀 새로운 공학적 발명의 원천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실제로 산업 현장에서 기술의 융복합은 주변적인 것으로 여기고 외면해왔던 공정 개선의 새로운 방법으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 예를 들어 제철 공장의 효율 개선 노력은 대부분 용광로 영역에 집중되어 왔다. 그러나 용광로 영역에서의 효율 향상이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원료와 생산된 제품을 운반하는 공정의 개선으로 관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핵심적인 제철 공정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의 공정 개선도 중요하다는 사실이 인식된 것이다.

우리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면서 예술과의 융복합이 공학 기술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백색 제품 일색이었던 가전(家電) 산업에서 다양한 색상의 제품은 물론이고 명화(名畵)를 활용한 제품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던 ‘데카르트’(Tech-Art) 디자인이 기술과 예술의 융복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 새로운 학문 영역을 위한 융합

학문 분야의 융합은 지나치게 갈라진 학문 영역을 서로 합쳐서 전혀 새로운 학문 영역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형식이기도 하다. 물론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과학자의 탁월한 영감에 의해 전혀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기도 한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등장이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서로 이질적인 학문 영역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영역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경우였다. 대표적인 융합 학문이라고 알려진 인지과학이 그런 경우다. 따라서 융합에 대한 시대적 요구는 단순히 과도한 분화에 대한 반발을 넘어서 새로운 학문의 창출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연과학은 요즘 우리 사회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통섭’(統攝)의 발원지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소개된 ‘통섭’에 대해서 ‘생물학적 환원주의에 의한 흡수 통합’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통섭은 단순히 우리에게 시대적 요구로 인식되고 있는 ‘융합’을 뜻하는 품위 있고 고상한 단어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consilience’를 처음 도입했던 휴얼도 ‘더불어 넘나듦’(jumping together)의 의미로 사용했고, 우리에게 통섭을 소개해준 생태학자 최재천이 적극적으로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앞세우고 있다는 흔적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통섭에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의심하고 경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사실 현대 기초과학에서 융합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기초과학(basic science, fundamental science, 또는 pure science)은 자연의 기본적인 관찰 대상이나 힘, 또는 그들 사이의 관계나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연구하는 분야로, 실생활이나 산업적 응용을 목표로 하는 응용과학(applied science)과 대비된다. 그런 기초과학의 구체적인 성격과 영역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기초과학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현대적 의미의 기초과학은 17세기 근대과학 혁명으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프랑스 혁명을 지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정립이 되었다. 20세기 초를 기준으로 하면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이 대표적인 기초과학 영역이었다.

20세기를 지나면서 기초과학에서는 끊임없이 융합과 분화가 이루어져왔다. 그런 과정에서 천문학이 우주론과 천체물리학(astrophysics)으로 발전하기도 했고, 분류학이 핵심이었던 생물학이 생리학으로 탈바꿈하고, 다시 생명과학을 발전하기도 했다. 해양학이나 기상학과 같은 전혀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기도 했고, 지질학의 경우처럼 기반이 통째로 흔들려버린 경우도 있었다. 융합을 통한 분화 덕분에 기초과학의 분류를 전통적인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이 아니라 ‘물리과학’(physical science), ‘생명과학’(life science), ‘지구과학’(earth science) 등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기초과학에서의 활발한 융합과 분화의 전통은 자연과학의 특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은 자연에 존재하는 생물과 무생물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지식 체계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등의 분류는 연구의 대상이나 방법에 따른 인위적인 구분일 뿐이다. 결국 자연과학에서의 융합은 연구 대상에 대한 인위적 구분의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요구인 셈이다. 결국 기초과학에서의 융합은 최근에 나타난 시대적 요구가 아니라 자연과학이 시작되면서부터 외면할 수 없는 내재적 요구이고, 앞으로도 그런 상황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에서 최근에 강조되고 있는 융합의 현실은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전통적인 융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3. 맹목적인 분화의 현실

우리에게 융합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된 것은 우리 사회에서의 과도하고 불합리한 분화와 단절이 일반화된 탓이다. 그런 현실은 대학과 초중등의 교육 현장에서 시작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대학에서의 과도한 분화와 단절

실제로 과도한 분화의 현실은 우리의 대학에서 가장 확실하게 확인된다. 실제로 우리나라 대학의 학과 구분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과도한 것이 분명하다. 서울대학교는 무려 16개의 단과대학에 84개의 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5개 계열의 72개 학과와 29개 협동과정이 개설된 일반대학원 이외에 무려 9개의 전문대학원이 있다. 다른 대학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사’, ‘동양사’, ‘서양사’, ‘고고미술사’가 분리되어 있고, ‘생명과학’, ‘화학생물공학’, ‘응용생물화학’, ‘식물생산과학’, ‘식품‧동물생명공학’, ‘바이오시스템학’이 독립되어 있다. 다른 대학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구시스템과학’과 ‘대기과학’이 분리된 대학도 있고, ‘글로벌리더’와 ‘글로벌비지니스’와 같은 기묘한 학과도 생겨나고 있다.

대학에서의 이러한 전공 분화가 학문적 필요성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학 구성원이 자초한 정치적 이유에서 분화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정체불명의 ‘맞춤형 교육’과 ‘세계적 수준의 선진화’를 강요하는 교육 당국의 불합리한 대학 지원 정책과 신입생을 확보하기 위한 대학 스스로의 인기 영합적 발상이 과도한 분화의 원인인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경우이거나 이러한 분화가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학생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과도한 전공 분화의 폐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식물’, ‘동물’, ‘미생물’을 합쳐 ‘생명과학부’를 만들기도 했고, ‘전기공학’, ‘전자공학’, ‘컴퓨터공학’ 등을 ‘전기공학부’로 합치기도 했다. ‘물리교육’, ‘화학교육’, ‘생물교육’, ‘지구과학교육’을 통합한 ‘과학교육학과’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제한적인 융합의 노력도 대학의 자발적인 노력이 아니라 교육 당국의 일방적인 강요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현실적으로는 무늬만의 융합이나 통합으로 그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 대학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도한 분화라기보다 학문 분야 사이에 만들어진 소통의 단절이다. 단과대학 사이의 장벽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고, 학과 사이의 단절도 심각한 수준이다. 우리 대학의 교과과정은 지극히 배타적이어서 다른 학과 학생의 수강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 같은 학과 안에서도 전공 영역 사이에 심각한 단절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원에서의 사정은 일반적으로 학부보다 더욱 심각하다. 학부의 교육이 부실해지고, 대학원의 교육에서 연구가 강조되면서 세부 전공 영역 사이의 단절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과 의학전문대학원이 만들어지면서 등장한 ‘자유전공학부’에서도 교육은 분과적으로 실시하고, 융합은 학생의 고스란히 몫으로 남겨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대학에서는 대학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미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학문 분야 사이의 소통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대학의 극심한 분화와 단절은 대학 입시를 통해 초중등학교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문학을 전공하게 될 학생들은 수학이나 과학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요구하고,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하게 될 학생들에게는 일찍부터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거부하는 자세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 불합리한 ‘문과’와 ‘이과’의 구분

우리 고등학교에서의 ‘문과’와 ‘이과’의 구분에 따른 폐해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사실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교육행정편의를 위해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일제 강점기의 잔재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것이다. 학생들의 적성, 학문적 특성, 사회의 업무를 포함한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우리의 관행으로 굳어져서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어왔을 뿐이다.

물론 특정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학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의 경우에는 적성이나 재능을 ‘문과’와 ‘이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문과적’ 성향과 ‘이과적’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더욱이 학생들이 스스로의 재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없는 고등학교에서부터 그런 구분을 강요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학생들이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아직 재능이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학생들에게 임의적인 기준에 따라 특정 분야의 과목만을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것은 편식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런 교육으로는 균형적인 시각을 가진 민주 사회의 시민을 양성할 수가 없다. 학생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민주화된 과학기술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소양이라면 억지로라도 채워주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다.

고등학교 2년 동안에 경험하는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사회 전체를 분열시키고, 효율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학문 영역에서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문과로 분류되는 우리의 인류학은 연대 측정 기술이나 고생물학적 연구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세계적 수준의 인류학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우리 인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포기하고, 단순한 비교 문화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자연계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감한 국제법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극지와 해양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과학자들은 국제법에 대해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맹목적인 친환경주의나 생태주의, 그리고 반(反)과학적 정서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도 불합리한 ‘문과’와 ‘이과’의 구분과 과학자 양성만을 목표로 하고 있는 비효율적인 과학 교육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교육 당국도 일찌기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제도적으로는 20여년 전에 시작된 제6차 교육과정에서부터 그런 구분을 철폐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을 비롯한 대학 입시에서는 학생들의 적성을 살려주고, 학습 부담을 줄여준다는 잘못된 핑계로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분명하게 살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등학교의 현장에서도 제도적으로 사라진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여전히 남아있고, 학부모와 사회는 여전히 그런 구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4.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진정한 융합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은 기술의 융복합이나 기초과학에서의 융합을 통한 분화와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으로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철학과 화학의 융합으로 새로운 학문 분야가 등장할 수는 없다. 통섭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인문학자들의 우려와 달리 자연과학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환원주의가 인문학에서도 성공적으로 적용될 것이라고 믿는 자연과학자도 많지 않다.

결국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은 새로운 학문 분야의 개발을 목표로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서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심각한 단절을 해소하기 위해 벽을 낮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처럼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 확실하고, 무작정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피상적인 만남을 거듭한다고 벽 낮추기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상대를 인정하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공동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1) 소통을 위한 벽 낮추기

그런 뜻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우리 자신의 역사적 경험과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으로서 우리의 미래를 조망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 인문학이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자연의 법칙과 정체를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연과학과 대척점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자연을 떠나 존재할 수 없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자연과학적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문학과 과학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인류문명의 두 축인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대립이나 경쟁의 관계일 수 없다. 오히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서로를 인정하고 균형을 이루어 양립(兩立)해야 하는 숙명적 관계일 수밖에 없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우주, 자연, 생명에 대한 우리의 자연과학적 이해는 과거와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거대한 천구(天球)에 붙어 있고, 천구에 고정된 별들을 배경으로 해와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7개 천체가 움직이는 모습에 우주 만물의 섭리와 인간의 미래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을 것이라는 인간 중심적인 소박한 전통적 우주관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져 버렸다. 별빛의 색깔을 분석해서 확인한 자료를 근거로 하는 현대의 우주론은 137억 년의 역사와 더욱 가속되고 있는 우주의 팽창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의 생명관도 완전히 달라졌다. 살아 움직이는 것만이 생명이라는 소박한 생명관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의 구분도 애매해졌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를 비롯한 미생물의 존재도 거부할 수 없는 형편이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바이러스’의 존재도 수용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간을 정점으로 고등생물과 하등생물을 구분하던 관행도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30억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에 이루어진 진화는 인간을 향한 진보의 과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만이 선택받은 종(種)이라는 인간 중심적 인식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생물종과의 관계도 과거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밝혀졌다. 이러한 변화를 무시하고 구태의연한 생명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살생’(殺生)을 금지해버린다면 자연에서 우리의 생존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자연과 인간에 대한 현대 자연 과학적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인간과 인간의 삶의 가치에 대한 인문학도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미 설자리를 잃어버린 전통적 우주관을 근거로 하는 철학적 주장을 ‘철학자의 별’과 ‘과학자의 별’이 다르다는 식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생명에 대한 현대 자연과학적 이해를 외면하고 생명의 고귀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가 유전정보에 대한 현대 과학적 사실과 무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해석도 현대 자연과학적 이해에 맞도록 재해석하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류 문명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바로 잡아야 한다. 현대의 기술이 심각한 부작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맹목적인 생태주의나 환경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자연이 인간에게 포근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보금자리라는 생각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환상일 뿐이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운명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비뚤어진 인문학은 지극히 비인간적인 것으로 아무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자연과학이 우리가 알고 싶은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과학만능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우주와 자연과 생명에 대한 우리의 자연과학적 이해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우주가 왜 더욱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우주의 팽창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 이후에는 어떤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사실 우리의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물질’의 정체조차도 완벽하게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생명 현상의 핵심인 유전 정보의 정체를 알아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유전 정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현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자연과학적으로 알아내고 싶은 모든 것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앞으로도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필수적인 요소로 남게 될 것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2) 과학 정신이 융합의 목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에서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표도 있다. 인문학이 과학적 성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이 단순히 과학적 성과를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는 없다. 자연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개발된 기술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을 융합이라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기술의 부작용에 대한 신랄한 인문학적 평가와 비판이 더욱 바람직한 기술 개발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400여 년 동안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과학 정신’을 공유하는 것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추구하는 융합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과학 정신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말한다. 객관적 증거에 대한 정직성, 합리성, 개방성, 민주성, 비판성이 그 핵심이다. 그런 과학 정신은 자연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소통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소통의 단절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덕목이기도 하다. 물론 왜곡된 증거를 가려내고, 합리성을 가장한 경직된 교조주의를 배척하고, 비판만을 위한 비판과 폐쇄적 이기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환경이 전제되어야만 그 힘이 발휘된다.

3) 교육 개혁과 문진이 융합의 현실적 방법

융합의 노력은 교육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교육행정 편의에 의한 문과와 이과의 낡고 불합리한 구분은 확실하게 철폐해야 한다. 전문가 양성을 목표로 하는 개념 중심의 교육도 고쳐야 한다. 초중등 학교에서의 음악 교육이 반드시 유능한 음악가 양성을 목표로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현대 문화인으로서 음악의 역사와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생활의 일부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특히 과학 교육은 과학 정신과 함께 과학의 의미, 가치, 역할을 가르치는 교양 교육으로 바꿔야 한다. 올해부터 고등학교에서 시작된 ‘융합형 과학’이 바로 그런 시도다. 국어, 수학, 사회에서도 대학의 전공을 흉내 낸 과도한 과목 쪼개기를 개선하야 진정한 융합형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STEAM’의 정체도 분명히 해야 한다. 본래 STEAM은 미국의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과학, 공학, 수학 교육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려는 ‘STEM’에 ‘교양’(liberal arts)을 추가하여 확장한 것이다. 초중등학교 수준에서 과학, 공학, 수학을 ‘예술’과 융합시키겠다는 발상은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것이다.

초중등 교육의 목표도 분명히 해야 한다. 입시를 통한 출세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공교육을 전인(全人), 공인(公人), 생산인, 자율인으로 정의되는 홍익인간을 길러내도록 확실하게 개혁해야 한다. 한 마디로 줄이면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에 유능한 민주 시민의 역량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 초중등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사 양성 기관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대학 입시에서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핑계 때문에 완전히 왜곡되어 버린 교육 과정을 바로잡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 가르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물론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효과적인 교수학습 방법을 개발해야 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위한 단계적 노력도 필요하다. 교육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꿔야 한다는 혁명적 개혁은 현실성이 없다.

대학에서의 학과 간 장벽도 적절한 수준으로 허물어야 한다. 물론 대학의 전공을 완전히 없애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중등 학교의 교육을 내실화함으로써 대학에서 낭비적인 교양 교육의 필요성을 감소시켜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비싼 비용을 부담하는 우리 사회의 대학생들에게 사회 교육으로도 충분한 교양 교육을 강화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대학의 교육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그 대신 학과와 전공 사이의 장벽을 낮춰서 관련된 전공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논어(論語)의 미자편에 나오는 ‘나루터를 묻는다’는 문진(問津)의 자세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진정한 융합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나루터는 본래 다양한 사람과 물산이 만나서 교류와 교역을 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다시 출발하는 곳이다. 이제 우리의 인문학과 자연과학도 나루터에서 함께 만나 서로 성과를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과학 정신으로 다시 출발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화된 과학기술 시대의 성숙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문진의 자세에서 핵심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하는 것이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상대를 정당하게 인정해줄 수도 없고, 다른 분야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상대와의 소통을 위한 노력도 중요하다. 서로 단절된 경험을 가진 분야에서는 똑같은 언어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단절이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언어의 독립적인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사용하는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원만한 합의에 이르는 노력도 필요하다. 물론 자연과학이나 인문학적 지식이 과학자의 합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역이 전혀 다른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에서는 합의가 상대의 성과를 인정해주는 유일한 길이 된다.

  5. 맺음말

그동안 우리 사회를 휩쓸어왔던 융합의 광풍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이나 합치고 뭉친다고 우리 사회의 문제가 해결되고, 단절되었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에 심각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물질적 풍요를 넘어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성과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