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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먹는 버섯
흙의 시간 / 후지이 가즈미치 지음 / 염혜은 옮김 /눌와
그렇다면 북반구에서 지금도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는 소나무과와 쇠퇴한 아라우카리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중 하나가 바로 뿌리에 있다. 북유럽의 소나무과는 대부분 ‘외생균근균’이라 불리는 버섯과 공생하고 있다. 외생균근균은 나무와 공생 관계를 맺고 뿌리를 감싸면서 균사를 발달시키는 버섯이다. 균사는 나무에서 당분을 받는 대신, 인이나 질소 등의 양분이나 물을 흡수하여 식물에게 내어준다. (69p)
외생균근균은 숲의 물질 순한 측면에서도 귀중한 존재이며, 산성토양에서 양분을 흡수하는 중요한 역할도 하고 있다. 외생균근균은 나무에서 받은 당분의 일부를 구연산이나 사과산 등 유기산으로 바꾸고, 그 유기산을 균사로 방출하는 방식으로 암석에 구멍을 뚫어 양분을 캐낸다. 이 독특한 능력 때문에 외생균근균의 별명은 ‘바위를 먹는 버섯’이다. 북유럽의 소나무과 숲에 발달한 포드졸의 표백층을 관찰하면, 균사가 광물에 뜷은 무수한 터널을 발견할 수 있다. 외생균근균은 균사를 펼쳐 양분을 효과적으로 흡수하고 그 일부를 나무에 건네준다. 또한 산성토양에서는 유해한 알루미늄이온도 다량으로 녹아나오는데, 균사가 방출하는 유기산은 유해한 알루미늄이온을 잡아서 해독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원래는 나무의 뿌리가 해야 하는 일을 외생균근균이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다. (69p)
많은 식물들은 외생균근균과는 다른 별도의 균근균(수지상체균근균)과 공생하며 육상 생활을 개시했다. 이 현상을 설명하려면 적어도 양치식물이 출현했던 4억 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지상체균근균은 식물 뿌리의 세포 내부에까지 균사를 꽃아 넣어 당분을 받는 대신, 물과 양분을 식물에 제공한다. 아라우카리아의 후예들도 이 균근균과 공생하고 있다. 다만 암석을 녹이는 능력, 흙을 변하게 하는 작용은 제한적이다. 북유럽의 소나무과는 적어도 5천만 년에서 1억 년 전부터 외생균근균과 공생 관계를 맺고 암석을 녹여 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추위와 산성이 심한 북방림에서 아라우카리아를 제치고 소나무과가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71p)
비가 많이 내리고 습윤한 2억 년 전 환경 아래, 널리 확산된 산성토양에 적응한 침엽수는 지상을 제패하고 공룡과 함께 번영을 누렸다. 낙엽과 뿌리를 통해 흙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외생균근균과 공생하며 효율적을 산성토양에 적응한 소나무과의 동류들은 지금도 북방림에서 번성하고 있다. (71p)
그런데 사실 대지를 석권하고 있었던 침엽수가 북방림으로 혹은 남반구 극히 일부 지역으로 쫓겨난 이유는 따로 있다. 새로운 종류의 식물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바로 속씨식물이다. (71p)
모래 위의 열대우림
■빈곤한 흙에 삼림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이유
영양이 부족한 흙 위에 근사한 열대우림이 자리 잡는 이유 역시 땅속에 존재한다. 열대우림을 특별한 존재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열대우림의 바닥 아래에 펼쳐진 뿌리의 ‘융단’, 통칭 ‘루트매트’는 사실상 북방림과 온대림의 주된 수종인 소나무과와 너도밤나무과의 나무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들의 뿌리 끝은 매우 가늘다. 실은 이 나무들은 동남아시아의 이우시과처럼 외생균근균이라고 불리는 버섯과 공생하고 있다. 소나무과 침엽수의 2억 년 생존을 지탱한 ‘바위를 먹는 버섯’과 마찬가지다. 뿌리가 굉장히 가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은 표면을 덮은 외생균근균의 균사 때문이다. (75p)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아마존에 남은 이우시과의 동류들은 대부분 외생균근균과 공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체 왜 동남아시아의 이우시과만 그렇게 특별한거지?” 하는, 남아메리카 아마존과 아프리카에 사는 나무들의 원성이 마구 들려오는 듯하다. (75p)
나는 이 질문을 세상에 내보이고 직접 부딪쳐보기로 했다. 고작 일개 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저명한 식물학자인 피터 애슈턴 박사에게 메일로 이 질문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곤드와나 대륙에서 온 이우시과가 아시아에서 너도밤나무과와 만나면서 외생균근균 구조를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정중한 어조로 보내주었다. (76p)
그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이우시과는 외생균근균과 공생함으로써 비로소 산성토양을 극복하고 동남아시아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이우시과 뿌리의 메커니즘을 조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칼리만탄니무르주로 날아갔다. (76p)
열대우림을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 60미터의 관측용 타워에서 본 저녁노을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타워를 내려오는 동안 내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고, 순간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나의 공포심이 당연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몇 년 후에 그 타워가 강풍으로 무너진 것이다! 그렇지만 이우시과는 쓰러지지 않았다. 이우시과가 쓰러지지 않은 것은 판근이 몸체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근은 물리적인 지지대일 뿐, 영양 흡수를 도와주는 것은 낙엽 아래에 펼쳐진 뿌리, 루트매트이다. (77p)
나는 외생균근균과 공생한 뿌리 주위의 물을 모아서 분석해봤다. 그랬더니 이우시과 뿌리 주변의 물은 구연산과 사과산의 농도가 다른 곳보다 유독 높았다. 열대토양에서는 인이 결핍되기 쉽다. 게다가 열대토양에서는 귀중한 인이 알루미늄이나 산화철에 갇혀 있다. 이 때문에 뿌리는 물은 흡수해도 인은 거의 흡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균사에서 방출된 유기산은 인을 포함하는 암석이나, 인과 결합해 있는 알루미늄이나 철을 녹인다. 그렇게 해방된 인을 사방으로 뻗어 있는 균사나 뿌리가 회수하는 것이다. (77p)
열대토양에는 열대 기후 특유의 문제도 존재한다. 방출된 유기산을 활발한 미생물들이 몇 시간이면 다 분해해버리는 것이다. 인을 녹이고 유해한 알루미늄이온을 에워싸려면 외생균근균은 유기산을 계속해서 내보내야 한다. 그를 위해 이우시과는 높이 60미터로 자라 나무의 최상부에서 광합성을 하고, 뿌리를 통해 외생균근균으로 당분을 계속 보낸다. 가히 아름다운 공생 관계라 불릴 만하다. 아무튼 외생균근균과 이우시과는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각 지상과 지하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78p)
키가 60미터나 되는 나무가 영양 면에서 유지가 되는 것은 눈에 보이자 않을 정도로 작은 차원에서 지하 세계의 뿌리와 외생균근균이 애쓴 덕이다. 산성토양에 대한 미신적 차원의 적응 전략 덕분에 이우시과는 동남아시아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열대우림의 높은 생산성은 흙을 매개로 한 이우시과와 외생균근균의 네트워크 덕분에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숲을 한꺼번에 벌채하면 회복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당초 흙 자체에 양분이 적은데 벌채를 하면 이러한 생물 간의 네트워크까지 갑자기 끊어져버리기 때문이다. (78p)
앞부분에서 소개한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성자필쇠의 이치’는 변하기 쉬운 꽃의 색깔에 무상의 개념을 중첩시킨 말이다. 일본에서는 노각나무 꽃을 이 이야기에 연관 짓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우시과의 꽃이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같이 시들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벌채에 취약한 성질 탓에 열대우림을 종종 ‘모래 위의 누각’에 비유하지만, 계획 없이 무분별하게 벌채하면 ‘사라쌍수의 꽃 색깔’처럼 쇠하는 것은 이우시과가 아닌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7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