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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의 언어 : 맛이란 무엇인가 개정판

내가 맛에 대한 책을 처음으로 쓴 것은 2012년 향료회사에 근무했을 때였다. 당시는 가공식품과 첨가물에 대한 오해와 불안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어서 바나나 향을 넣어 만든 우유를 가지고도 온갖 시비가 있을 정도였다. 맛과 향에 대한 제대로 된 과학적 설명이 없으니 수만 가지 음식의 다양한 맛이 0.1%도 되지 않는 향기 물질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향을 넣은 우유조차 그렇게 불안해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칠맛이 글루탐산에 의해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MSG를 가지고 몸에 나쁜 화학적 첨가물이라고 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방송과 인터넷에는 음식과 맛집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과학적 설명은 없고 재료의 예찬인 경우가 많다. 방송은 새벽시장에 가서 좋고 신선한 재료만 구하면 저절로 맛있는 음식이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정작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노력과 창의력은 무시되었다. 심지어 좋은 재료라는 것도 과학적이나 영양적 가치가 아니고 얼마나 구하기 힘든 희소한 것인지 또는 자연산인지 아닌지 여부가 주된 관심사였다. 음식에서 요리사가 지워지고, 먹는 사람의 개성과 취향도 지워진 채로 말이다. 음식을 고작 아플 때나 필요한 약에 비유한 ‘약식동원’이라는 단어를 음식 폄하가 아니라 오히려 예찬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과거보다는 많이 바뀌어서 내가 그토록 맛과 향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리려고 노력했던 것에 대한 작은 보람이 느껴진다.

사실 이 책의 전작이자 기초인 『Flavor, 맛이란 무엇인가』는 190쪽의 “알 수 없는 수백 가지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천연향마저 안전한데, 검증된 30종 이하의 원료로 만들어진 합성향은 얼마나 더 안전하다는 말인가? 이것이 합리적인 생각이다”라는 한 줄을 말하기 위해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성 바나나 향이나 천연 바나나나 실제 맛(향)을 내는 성분은 동일하다. 분자구조나 기능은 같고 단지 그 출처만 조금 다른 것이다. 오히려 천연향에는 비록 그 양은 매우 적지만 식품에 허용할 수 없는 성분도 들어 있는데, 합성향은 사용하는 모든 원료가 안정성을 평가하여 허가된 원료만 사용하므로 안전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검증되었다.
향은 천연이든 합성이든 굳이 그 안전성을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시 만연해있던 천연향은 안전하고 합성향은 무조건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아무리 “합성향이 천연향보다 안전합니다!”라고 주장해도 그것을 믿어주기는커녕 정신 나간 사람 취급 받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그러니 합성향의 안전성을 말하기 전에 맛과 향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거기에 후각의 특징과 의미 등을 설명하다 보니 결국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다. 참고로 『Flavor, 맛이란 무엇인가』는 출간 2년 뒤 미국의 ‘와일리(Wiley-Blackwell)’ 출판사에서 『How flavor works』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는데, 이 제목이 훨씬 내용에 걸맞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풍미(flavor)에 대한 마땅한 단어가 없다 보니 출판사에서 제안한 『Flavor, 맛이란 무엇인가』로 제목을 지었다.
그렇게 나의 ‘맛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식품회사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지만, 맛을 과학으로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고, 식품회사 연구소에서 신제품을 개발하면서 경험했던 것과 시중에 출시된 온갖 신제품을 시식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맛의 원리』를 썼다.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맛은 음식을 통한 즐거움의 총합’이라고 내 나름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5년이 지나 생각을 다시 한 번 가다듬어 작년에 증보판을 출간했고, 그 연쇄효과로 이 책마저 개정할 필요성이 커졌다. 오래된 내용은 업데이트하고 맛과 향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없애기 위해 장황히 설명한 내용은 이제 덜어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향의 언어』로 바꾸고 후각과 향기 물질에 집중하기로 했다.
식품의 성패는 맛이 좌우하고, 맛의 성패는 향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지만, 막상 향을 구성하는 향기 물질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향을 조금이라도 깊이 공부하다 보면 향기 물질을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 복잡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외면한다. 사실, 향을 구성하는 개별 물질은 일반인은커녕 식품회사 연구원마저 직접 경험할 기회가 별로 없다. 이름부터 화학책에나 등장하는 낯선 이름이고, 향기 또한 매우 강력하며 친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개별 향기 물질로 뭔가 그럴싸한 설명이나 결과물을 만들기 힘든 것이다. 그러니 맛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작 그것의 핵심인 향기 물질에 대해서는 쏙 빼고 말한다. 수학이나 물리에서 어렵다는 이유로 방정식을 빼고 말하는 셈이다. 핵심은 사라지고 말은 길어진다. 사실 향기 물질은 맛(향)의 언어(단어)와 같다. 우리에게 언어가 없다면 어떤 깊이 있는 생각도 이어갈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다. 향에 대한 단어가 없으니 맛을 말로 표현하기 그렇게 힘든 것이다.
만약에 외국인에게 막걸리의 맛을 설명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막걸리뿐만 아니라 어떤 식품이든 그것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맛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향을 묘사할 단어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답답함을 덜어보고자 ‘플레이버휠(Flavor wheel)’ 같은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플레이버휠은 와인이나 커피 등을 마실 때 느껴질 수 있는 온갖 향을 휠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와인에서 바닐라, 정향, 바나나 향이 느껴진다 해서 와인에 그런 것이 실제로 들어 있지는 않다. 바닐린(Vanillin), 유제놀(Eugenol), 이소아밀아세테이트(Isoamyl acetate) 같은 향기 물질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자는 와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향신료, 과일, 꽃 등 대부분의 식물에 들어 있다. 어떤 음식이든 향을 조금만 더 깊이 공부하면 결국에는 비슷한 향기 물질과 만나게 된다. 세상의 그토록 다양한 맛은 향에 의한 것이고, 향은 여러 향기 물질의 다양한 변주곡인 것이다.
향기 물질의 관점에서 본다면 꽃, 향신료, 과일, 와인, 전통주 등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저 같은 물질의 다양한 배합비인 것이다. 우리가 그런 향기 물질에 친숙하다면 향신료, 차, 과일, 피톤치드와 같은 다양한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쉬워지고, 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식재료를 조합할 때도 왜 그런 조합이 잘 매칭되는지에 대한 원리의 탐구도 쉬워질 것이다.
내가 최근 들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향기 물질에 대한 관심을 좀 더 일찍 가지지 못한 점이다. 학교에서 식품을 공부할 때만 해도 후각과 기억이 좀 더 예민했던 때라 한 달에 몇 개씩만 익혀도 식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100개 정도의 향기 물질은 금방 익히지 않았을까 싶다. 전문 조향사가 되려는 것이 아니니 100개 정도의 향기물질만 잘 알아도 식품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식품의 향기 물질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없고, 심지어 향기 물질을 공부할 마땅한 책마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번 책에 다른 부분은 과감히 덜어내고 향기 물질에 관한 내용을 대폭 추가했다. 그 덕에 책의 내용이 상당히 어려워지고 두툼해졌으나 나름 가장 실전적인 내용만 엄선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향은 음식의 꽃이다. 맛을 다룬다는 것은 향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향은 음식에 섬세함과 다양함을 부여한다. 이 책이 향기의 언어를 찾는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5장. 감각의 원리, 냄새는 어떻게 맡을까
- 인간은 어떻게 1조가지 냄새를 구분할 수 있을까
- 왜 어떤 분자는 강한 맛을 내고 어떤 분자는 약할까
- 감각의 과학이 말해주는 것들

6장. 맛과 향의 심리학
- 맛의 심리학 : 맛의 본질도 기억이다
- 향의 심리학 : 향이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는 이유
- 진화 심리학 : 우리 몸의 유전자 숨겨진 욕망
- 맛은 주관적이라 다양성이 있고, 객관적이라 과학이 있다

9장. 맛의 상호작용, 맛은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 분자의 레벨, 왜 주변의 분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가?
- 감각의 레벨, 왜 농도 등 조건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가?
- 인지의 레벨, 왜 정보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가?

10장. 맛의 가치는 무엇일까
- 매일같이 평생을 찾아오는 즐거움은 맛이 유일하다
- 맛의 역사가 음식의 역사이고 생명의 역사이다
- 먹는 즐거움과 식사의 즐거움은 다른 것이다

마치며 : 향은 조화로 완성된다

이번 책은 무엇보다 그동안 내가 쓴 책 중에 가장 두껍고 어려운 책이 된 것 같다. 책이 너무 두꺼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름 노력을 기울인 것인데도 그렇다. 심지어 내가 하고 싶었던 “우리는 어떻게 향기를 감각하고 지각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만큼 향은 맛의 현상 중에서도 단연 복잡하다.
미각은 5가지뿐이지만 향은 수용체가 400종류이고 그것으로 감각하는 식품 속 향기 물질이 1만 종류가 넘으니 복잡한 게 당연하다. 더구나 후각 수용체는 한꺼번에 여러 물질에 반응하고, 수용체 간에 복잡하게 억제와 상호작용을 해서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향과 향기 물질에 대해서 말한 것은 맛에 대한 최종적인 공부가 향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K-푸드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커피 시장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어느새 우리나라의 커피 시장이 전 세계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고, 가장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솜씨도 뛰어나 이제는 남을 따라하는 수준을 벗어나 시장을 선도할 독자적인 이론과 기술이 필요해졌다. 커피뿐 아니라 다른 식품에서도 좀 더 깊이 있고 실전적인 이론의 필요성이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향에 대한 과학적 공부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향을 향기 물질로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제대로 활용해도 남들보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향은 맛의 다양성을 부여하는 가장 결정적인 수단이자, 사람들이 맛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지금도 향이 뛰어난 제품이 유난히 비싸고 귀한 대접을 받는다.
향은 조화로 완성되는 것이라 수많은 향기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되지 결코 홀로 멋진 향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한국인은 조화에 대한 감각이 특별한 것 같다. 지금 해외에서 각광을 받는 한국의 식품은 한국만 가지고 있는 빼어난 식재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흔하고 평범한 소재를 비범하게 엮어내 만든 것들이다. 한국인은 항상 맛에 진심이었고, 새로운 것에 과감히 도전해 최적의 조합을 찾아냈다. 남들을 따라 하기도 열심이지만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는 고집도 충분하다. 세상 누구보다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끌어내는 능력이 있고, 열정과 고집이 같이 있는 것이다.
나는 과거에 향료 분야는 우리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서양을 뛰어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의 눈부신 성과들을 보면 이제는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측면에서 향기 물질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단지 맛의 평가와 인상의 포착에 새로운 수단으로 향을 공부 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어떤 목적이든 이제는 향기 물질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향기 물질을 극소수의 조향사만 공부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누구나 쉽게 경험해보고, 맛의 언어로 사용되는 시기가 빨리 다가왔으면 좋겠다. 모든 식재료의 향을 가장 핵심적인 성분으로 간명하게 제시하고 싶었지만, 아직 조사와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변죽만 울린 것 같아 아쉽고 송구하다.



페이스북       방명록      수정 2021-05-26 / 등록 2017-04-23 / 조회 : 2044 (185)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불량지식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  2009.12  최낙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