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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원료, 공정, 설비,포장

과일음료의 공정





주스와 냉장 기술의 공생
농축환원 주스부터 초고압처리 주스까지, 기술과 함께 변모한 주스의 역사를 살펴본다.

text 정재훈 / edit 권민지 / photograph 박재현 / product 윤현상재(02-540-0145)

살다 보면 냉장고를 부탁할 일은 많지 않다. “냉장고야 부탁해”가 현실이다. 식욕이 왕성한 고등학생은 집에 오면 제일 먼저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혼자 밥 먹기의 달인이라도 기본 아이템인 냉장고가 없으면 먹고살기 힘들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많은 음식이 냉장과 냉동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 주스가 있다.

실온에 보관하는 과일 주스도 냉동을 거친 것이다. 미국과 브라질에서 수확한 오렌지의 과즙을 농축하여 배에 싣고 가져오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리는데, 이때 변질을 막으려면 영하 18℃ 이하의 냉동 보관은 필수다. 이렇게 농축된 과즙에 다시 적당량의 물을 타서 원래 농도로 되돌리면 100% 오렌지 주스가 되는데 농축액을 환원하는 과정에서 혹시라도 유입된 미생물을 제거하기 위해 고온으로 살균 처리해야 한다. 문제는 가열이다. 우리는 냉장에 관대한 반면 가열에는 민감하다. 냉장이 영양소를 보존하는 기술이라면 가열은 비타민을 파괴하는 기술로 간주한다. 농축환원 주스부터 초고압처리 주스까지, 과일 주스의 역사는 냉장과 가열 사이의 갈등을 축으로 하는 한 편의 드라마다.

이야기는 20년 전 냉장 주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과일을 삶아 드시겠습니까”라는 공격적인 카피 문구는 우리가 마시는 과일 주스가 실은 가열된 것임을 폭로했다. 실내 온도에서 2년간 보관할 수 있는 이유가 98°C에서 10초간 고온 살균한 덕분이었다니. 사람들은 흔들렸다. 그리고 냉장 유통 주스가 새로운 주연 배우로 떠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냉장 유통 주스는 무늬만 냉장이었고 사실은 원액을 농축하는 과정에서 이미 가열을 거친 것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고온살균 주스 맛과 별 차이가 없었어.’ 팬들은 실망에 찼다. 바로 그때 NFC 주스가 화려하게 무대에 올랐다. 농축시키지 않은 오렌지 생과즙을 넣었다는 NFC 주스의 등장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우리도 생오렌지로 갓 짠 주스를 맛보게 되었구나.’ 하지만 드라마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NFC 주스의 거짓 경력이 들통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NFC는 ‘비농축(Not From Concentrate)’ 주스가 아니라 약자만 같을 뿐 ‘새롭고 신선한 냉장(New Fresh Chilled)’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종 교배였던 것이다. 농축과즙환원 방식의 주스에 5%도 안 되는 비농축과즙을 소량 넣은 주스가 감히 NFC 주스 행세를 하다니. 대중은 분노했다. 우리에게 진짜 NFC 주스를 달라!

몇 년 뒤 비농축과즙만을 사용한 진정한 NFC 주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NFC 주스 역시 가열해서 만든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가열한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가열이 모든 영양소를 파괴하지 않으며, 어떤 성분은 열을 가하고 나면 더 잘 흡수된다는 사실도 중요치 않았다. 소비자의 눈에는 끓이든 데우든 가열은 가열이다. 열을 가하면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대중은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초고압처리 주스가 등장했다. 착즙한 주스에 열 대신 강한 압력을 가해 효소와 미생물을 잠재운 것이다. 효소나 미생물이 활동하려면 단백질로 만들어진 복잡한 구조물이 유지되어야 한다. 엄청나게 강한 압력을 가하면 덩치 큰 구조물은 파괴된다. 비타민과 같은 영양 성분은 사이즈가 작고 구조도 비교적 단순해서 압력을 버티고 살아남는다. 열 대신 압력을 이용해서 단백질 구조를 붕괴시키는 초고압처리는 식품 가공기술의 첨단이다. 과일 주스는 가공식품이다. 그냥 가공식품이 아니라 식품 가공기술의 정점에 오른 가공식품이다.

초고압추출법으로 만든 주스는 가격도 제일 비싸다. 200ml 작은 병의 가격이 농축환원주스 1.5L 한 병과 맞먹는다. 건강을 위해 마시는 음료이니 비싼 가격을 감수하고 초고압추출 주스를 마셔야 할까. 현대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적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다. 과일 주스는 과잉이 되기 쉬운 음식이다. 오렌지 주스 한 잔에 무려 각설탕 8~9개 분량의 당이 들어 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각국 정부가 나서서 과일 주스 섭취를 제한하도록 권고하는 것도 주스 속의 당 때문이다. 수확 후 24시간 내에 착즙한 초고압처리 주스도 본질은 같다. 주스는 당분 음료다.

기술은 빠른 속도로 진보한다. 그러나 몸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신체는 과일 그대로를 먹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오렌지 2개를 먹는 데 걸리는 시간과 주스 한 잔을 마시는 데 걸리는 시간 차만큼 주스와 과일의 소화도 다르게 진행된다. 과일 속의 당분은 단단한 식물 세포벽 안에 붙잡혀 있어서 흡수가 느리다. 주스의 당분은 빠르게 흡수된다. 혈중 포도당 수치가 급속도로 상승하면 우리 몸은 많은 양의 음식이 들어올 것을 기대하여 과잉의 인슐린을 내보낸다. 이로 인해 저혈당이 생기면 다시 식욕이 돋는다. 빈속에 과일 주스를 마시면 더 배고파지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과일 주스처럼 혈당치를 빠르게 상승시키는 음식을 당 지수가 높은 음식이라고 하는데, 이런 음식을 많이 먹으면 비만과 당뇨의 위험이 증가한다.

건강 때문이라면 굳이 초고압추출 주스를 마실 이유가 없다. 하지만 주스가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는 관념은 바꾸기 어렵다. 즙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생각은 오래된 믿음이다. 18세기 파리에서 원래 ‘레스토랑’이란 말은 음식을 맛보는 장소가 아니라 닭이나 쇠고기 육수를 의미했다. 이후 레스토랑은 고기 육수를 먹는 곳을 거쳐 현대의 레스토랑으로 변모했지만, 건강에 좋은 즙이라는 원래의 의미는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계 유수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들은 과일 주스를 샷 글라스에 내놓는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레스토랑 노마에서는 와인 대신 주스 페어링을 선택할 수도 있다. 오래된 전통의 새로운 해석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육즙이 과즙으로 변하긴 했지만, 현대의 레스토랑에서 내놓는 주스와 18세기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고기 수프에는 같은 뜻이 담겨 있다. 주스라는 액체 음식이 사람의 원기를 건강하게 회복시켜줄 거라는 믿음이다. 샷 글라스에 담긴 적은 양의 주스가 해로울 리 없으니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렇다고 과일 주스로 해독한다는 생각은 무리다. 해독은 간과 신장이 하는 일이지 으깨진 과일 세포에 의존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 테이블에 당당하게 자리한 주스 잔 속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담겨 있다. 주스는 요리사에 의해 가공 조리된 음식이다. 주스와 생과일의 맛은 다르다. 과즙을 내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포도 알갱이를 유리잔에 모으고 가볍게 스푼으로 눌러서 짜낸 즙을 맛보자. 포도알을 하나씩 입에 넣고 씹을 때와는 다르다. 단단한 식물 세포벽 안에 잡혀 있던 온갖 성분이 빠져나와 뒤섞인 주스의 맛은 강렬하다. 하지만 그 맛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한다. 녹아 나온 성분들과 효소가 반응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직접 과일을 갈아 만든 주스가 시간이 지나면 두 층으로 분리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과일 세포 속 각기 다른 방에 살고 있던 효소와 펙틴 성분이 주스 속에 뒤엉켜 가라앉는 것이다. 농축이든 비농축이든 착즙된 주스를 우선 가열부터 해주는 것은 효소의 작동을 정지시키기 위함이다. 열 대신 강한 압력을 가해서 효소를 정지시킨 게 초고압처리 주스다. 무엇을 섞고 어떻게 즙을 내어 얼마의 시간 뒤에 어떻게 내놓을 것인가. 주스에는 복잡한 요리의 화학이 녹아있다. 주스 만들기는 지식과 경험, 기술과 도구를 필요로 한다.

주스는 기술에 대한 현대인의 이중적 관점을 보여주는 음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식품의 가공과 보존을 위한 오래된 기술인 가열에는 거부감을 느끼면서 역사가 짧은 냉장 기술은 신뢰한다. 마치 전자파 걱정에 전기밥솥 대신 압력밥솥을 사용하면서 휴대폰으로는 장시간 통화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만든 기술치고 완전무결한 기술은 없다. 하지만 기술은 포용해야 할 현실이다. 즐거운 삶을 위해서는 기술을 도외시하기보단 기술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게 지혜롭다. 무더운 여름날, 차갑게 식힌 플로리다산 오렌지 주스를 바다 건너편에서 맛볼 수 있는 건 오랫동안 축적된 사람의 기술 덕분이 아닌가. 그러니 어떤 주스든 천천히 조금씩 맛보며 즐기시라. 사실을 말하자면, 요리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


페이스북       방명록      수정 2015-08-22 / 등록 2015-08-22 / 조회 : 7128 (832)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불량지식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  2009.12  최낙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