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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기술

적정기술 : 소외된 90%를 위한 기술

by 이희욱 | 2010. 11. 28 (7) 따뜻한 디지털, 사람들

“전세계 설계자는 그들의 시간 대부분을 구매력 있는 10% 미만의 소수 소비자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은 바로잡아야 한다.”
- 폴 폴락, ‘Out of Poverty’(2008) 가운데

정보기술(IT)이 우리네 삶을 살찌운다지만, 그 혜택을 받는 이는 10명 가운데 1명에 불과하다. 아프리카를 보자. 수백만명 사람들이 물부족에 시달린다. 아이들 5명 가운데 1명은 태어난 지 5분이 채 안 돼 죽는다. 대개는 콜레라와 이질 같은 수인성 전염병 때문이다. 마실 물은 수백km 넘게 떨어져 있다. 물을 운반하는 일은 고역이다. 이들에게 ‘Q드럼’은 혜택이다. 물을 담아 쉽게 굴릴 수 있게 원주형으로 설계됐다. 한 번에 75리터의 물을 운반할 수 있다. 케냐와 나미비아, 에티오피아와 르완다, 탄자니아 지역에 널리 보급돼 있다. 이처럼 IT 혜택에서 소외받은 이들을 위해 쓰이는 기술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다. 영국 경제학자 E.F.슈마허가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저개발국가를 위한 소규모 생산기술인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을 처음 언급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적정기술’이란 개념으로 확대됐다. 적정기술은 한 마디로 ‘고액 투자가 필요하지 않고, 에너지 사용이 적으며, 누구나 쉽게 배워 쓸 수 있고, 현지 원재료를 쓰며, 소규모 사람들이 모여 생산 가능한 기술’이다. 전문화와 대량생산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시장 흐름을 거부하고 소규모 현지 생산을 추구하는 대안기술이자, 대안 문화인 셈이다.

미국에선 1970년대 들어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본격화됐지만, 한국에선 아직 낯설다. 2008년께 들어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겨나고, 연구자도 하나둘 늘었다. 홍성욱(46) 한밭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적정기술을 국내에 알린 개척자 가운데 한 명이라 하겠다. “2007년 5월이었던가요. 미국 뉴욕 쿠퍼휴잇박물관에서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을 주제로 전시회가 열렸어요. 그 때 발간된 책을 2007년말께 우연히 보고, 적정기술이란 걸 처음 알게 됐습니다. 당시 크리스천 과학기술인 포럼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적정기술 관련 경진대회를 포럼에서 진행해보자고 제안을 했죠. 헌데 국내에선 아직 적정기술 관련 개념도 잘 모르는 때였어요. 경진대회를 열기엔 이를 것 같아서 아카데미부터 시작하기로 했죠.” 그렇게 2008년 8월 한동대에서 ‘소외된 90%를 위한 공학설계 아카데미’를 열었다. 지난해 7월에는 2회 아카데미도 진행했다. 국내 대학생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모아보는 경진대회는 지난해와 올해 두 번 열었다. ‘소외된 90%를 위한 창의적 공학설계 경진대회’란 이름으로 열린 행사에선 18개팀이 참여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태국 고산지역 주민들을 위한 황토온수 난방 시스템이나 화덕, 반자동 모종기와 불소제거장치 등이 주목을 끌었다. 올해 3월에 열린 2회 대회엔 22개팀이 참여하는 등 관심도 넓어지는 추세다. 지난해 6월에는 아예 한밭대학교 안에 ‘적정기술연구소’를 열었다. 네이버스는 나눔에 뜻을 둔 대전지역 과학자 모임인 ‘나눔과기술’과 함께 지난해부터 ‘G세이버’(G-SAVER)란 축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겨울 추위에 떠는 몽골 주민들을 위해 열 효율 높고 매연은 적은 새 난로를 제작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특허청도 힘을 보탰다. 이렇게 탄생한 ‘G세이버’ 100대는 올해 2월 몽골 칭길테 마을 주민들의 겨울을 데웠다. ‘대한민국 제2호 적정기술’ 탄생도 머잖았다. 홍성욱 교수가 속한 나눔과기술이 특허청, 굿네이버스와 함께 진행하는 ‘차드’ 프로젝트가 한창 가속도를 내고 있다. 땅이 사막화되면서 벌목이 금지된 아프리카 차드 지역 주민들이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사탕수수로 만든 숯을 보급하는 사업이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진행하는 ‘브릿지사업단’에는 삼성전자와 한국국제협력단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 청년활동가들을 세계 곳곳에 파견해 풀뿌리 교육과 지역사회 발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아프리카 지역에도 현재 18명 사업단 청년이 파견돼 지역 교육과 교류를 돕고 있다. 하지만 적정기술 관련 연구나 활동은 여전히 변방을 맴도는 상태다. “국제사회도 학회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워크숍 형태의 느슨한 조직이 운영되는 정도입니다. 관심 있는 학자들끼리 자발적으로 여는 행사죠. 국내에선 국경없는과학기술연구회나 나눔과기술, 대안기술센터 같은 곳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은 따로 활동하는 단계로 보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통합 재단이나 단체가 생겨나야겠죠.” 다행히 앞길은 밝다. “미국엔 MIT나 스탠포드, 미시건, 브라운대학 같은 곳에서 교육과정으로 적정기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국경없는공학자’ 같은 조직도 적정기술 보급에 앞장서고 있고요. 한국에선 올해 11월, 한국공학교육학회가 제주도에서 열렸는데요. 거기에 적정기술 세션이 반나절 일정으로 포함됐습니다. 공적 영역에서 처음 마련됐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입니다. 이처럼 적정기술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과학자들 참여를 늘리는 게 국내에서도 필요하겠죠.”

홍성욱 교수는 “적정기술은 책상물림 학문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현지를 직접 찾아보고 국제감각을 익히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물론 그보다 급한 건, 적정기술 개념 자체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저개발국가라곤 한 번도 안 들러봤던 홍 교수가 2008년 태국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에티오피아, 가나, 필리핀, 몽골 등을 수시로 드나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내에서도 관심 있는 곳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마다않고 뛰어가 적정기술을 알리고 의견을 듣는다. “그래도 아직 청중의 절반 가까이는 ‘나와 관계 없는 기술’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며 홍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적정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그걸 이용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죠. 빈곤 퇴치냐, 삶의 질 개선이냐. 이는 해외 원조와도 연결됩니다.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아직 한국은 기술개발 수준에 머물러 있는 모양새에요. 그걸 극복하는 게 우선 숙제입니다.”

※ 적정기술 활용 주요 사례

■ Q드럼(Q Drum)

식수원이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시골지역 주민들을 위해 고안됐다. 식수에 필요한 양의 물을 보다 쉽게 운반할 수 있는 물통이다. 물동이를 지는 대신, 줄로 굴릴 수 있는 원주형으로 설계됐다. 한 번에 75리터의 물을 운반할 수 있다. 케냐, 나미비아, 에티오피아, 르완다,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등에 보급됐다.


■ 라이프 스트로우(LifeStraw)

해마다 6천여명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간다. 대개는 어린이다. 라이프 스트로우는 휴대할 수 있는 개인용 정수기다. 땅에 고인 더러운 물도 깨끗한 물로 걸러준다. 15마이크론 이상의 입자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필터를 내장했다.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설사 같은 수인성 질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 가나,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우간다 등에 보급돼 있다.



■ 팟인팟 쿨러(Pot-in-Pot Cooler)

아프리카 저개발 지역은 물과 전기가 부족하고 운송 수단도 열악한 탓에, 수확한 농산물을 보관하는 문제가 큰 걱정거리다. 팟인팟 쿨러는 아프리카식 냉장고다. 큰 도기와 작은 도기를 겹쳐 넣고, 그 사이에 모래와 물을 채워넣었다. 물이 증발하면서 작은 도기 속 열을 빼앗아 야채나 과일을 신선하게 보관하게 해준다. 상온에 보관하면 2~3일이면 상하던 토마토가 팟인팟 쿨러를 쓰면 21일 동안 보존된다. 카메룬, 차드,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등에 보급돼 있다.



■ 사탕수수 숯(Sugarcane Charcoal)

장작을 취사 연료로 주로 쓰는 아이티는 산림 황폐화가 심한 지역이다. 전체 산림의 90%가 이미 폐허 상태다. 취사시 나오는 실내 매연은 아이들 호흡기 질환의 주된 원인이다. 그 대안으로 개발된 게 사탕수수 숯이다. 사탕수수 주스를 뽑아내고 남은 찌꺼기(Bagasse)를 말린 뒤 화로에서 불완전 연소시킨다. 이렇게 만든 숯을 잘게 부숴 점성을 지닌 카사바 뿌리와 섞은 뒤 일정한 모양으로 찍어내면 나무 숯처럼 잘 타는 조개탄이 완성된다. 사탕수수가 아니라도 옥수수 속 같은 농업 부산물을 써도 된다. 아이티, 가나, 브라질 등에서 즐겨쓴다.


(자료 : 홍성욱 한밭대학교 적정기술연구소장)

 


 


 

폴락이 세운 IDE의 대표작인 페달펌프도 적정기술이 시혜적 모델로의 한계를 넘어 사업적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례다. 페달펌프는 물이 부족한 저개발국 빈농을 위해 발로 밟아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간편한 장치. IDE는 30년 전 방글라데시 농민들에게 단돈 25달러의 페달펌프를 150만대나 팔아 이윤을 남겼다. 하늘에만 의존해 농사를 짓던 농민들도 페달펌프를 구입하고 연간 소득이 100달러 이상 늘었다.


 

물과 표백제로 불 밝히는 ‘모저 램프’

브라질 기계공 알프레도 모저의 ‘페트병 전구’도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적정기술이다. 모저 램프라고도 불리는 페트병 전구는 물을 채운 플라스틱 병과 약간의 표백제로 전기 없이도 빛을 밝힐 수 있다. 지붕에 구멍을 뚫어 페트병을 그 자리에 넣으면 태양광의 정도에 따라 40~60와트 밝기로 빛난다.
모저가 이 천연 전구를 만든 계기는 2002년 그가 살던 브라질 남부 우베라바 지역에 발생한 잦은 정전 때문이었다. 모저와 친구들은 전기가 끊기자 한 데 모여 만약 비상 상황이 생기면 외부에 이를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궁리했다. 그 때 그의 상사 한 명이 페트병에 물을 채우고 마른 풀 밭에 놓은 후 태양광선으로 화재를 일으켜 구조대에 알리자는 제안을 했다. 페트병에 물을 받아 굴절되는 빛을 이용한다는 아이디어는 페트병 전구의 영감이 됐다.
모저 램프의 빛은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대나무, 타이어 등 다양한 재료로 집을 짓는 필리핀 마이쉘터재단 설립자 일락 디아즈도 가세했다. 디아즈는 태양광 전구를 달아 밤에도 쓸 수 있도록 한 발 더 나아갔다.
모저 램프는 필리핀에서 유난히 인기다. 인구 4분의 1이 빈곤층이고 전기료가 비정상적으로 비싼 필리핀에서 페트병 전구는 14만가구에 빛을 선사했다. 일부는 이를 이용해 수경 재배도 하고 있다.
BBC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인도 방글라데시 탄자니아 아르헨티나 피지 등 약 15개 국가 100만가구에 페트병 전구가 보급됐다. 모저와 마이쉘터재단은 이 장치를 빈민가에 설치하는 ‘빛의 리터’ 운동을 함께 벌이고 있다. “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주었다”며 “그러니 빛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게 모저의 모토다


 

베스터가드 프란센은 라이프스트로 외 또 다른 구호용품인 ‘퍼마넷’(permanet)을 개발했다. 기본 형태의 모기장에 말라리아 방지제에다 살충제를 첨가한 것으로, 모기로 인한 말라리아 감염을 막기 위해 마련된 강력하고 안전한 모기장이다. 가끔 세탁을 하더라도 3, 4년 살충 효과가 지속된다. 아프리카 대륙의 연간 말라리아 사망자 숫자가 100만명 이상을 웃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가치를 값으로 매기기 어려운 물건이다. 세계보건기구(WHO)도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이 모기장 보급에 힘쓰고 있다. WHO는 퍼마넷 덕분에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생존율이 30% 이상 늘어났다고 추산하기도 했다.


페이스북       방명록      수정 2015-02-13 / 등록 2011-01-13 / 조회 : 18337 (954)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불량지식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  2009.12  최낙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