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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 DNA원시인

내 몸안의 원시인의 흔적

- 양복입은 원시인,  정장입은 사냥꾼

우리가 먹는 것은 과거의 추억이다
- 불 그리고 Roasting의 추억
- 가열에 의한 여러가지 향기성분의 생성
- 한국인이 유난히 참기름에 갈망한 이유
- 요리 : 인간진화의 촉진 vs  위험한 불장난

본능의 강렬하고, 식욕의 대처 방식은 1만년전 그래로다
- 식욕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  마약(보상욕)은 강하다
- 기아모드 : 스트레스를 받으면 살찐다
- 왜 모든 다이어트는 실패하였는가 ?

내 몸의 반란 : 질방의 원인의 수백가지는 유전자문제에서 나온다
- 보상의 반란 : 중독
- 면역의 반란 : 알러지,면역질환
- 세포의 반란 : Cancer
- 진화 :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 왜 그럼에도 살아 남았나
- 아파야 산다

     vs

내 자신을 좀더 쉽게 이해하는 방법
- 왜 사소한 이유로 남자와 여자는 엇갈리는가 ?
- 고대 기억술의 원리, 기억 퇴화의 이유
- 성격은 진화의 산물
- 진화 심리학

원시인 Mind, 원시인 사고방식 : 사고 방식도 원시인 수준이 많다
- 원시인 Mind : 원시종교 Animism, 물신숭배, 우상숭배
- 자라는 오래 사는 동물이니 자라는 건강장수식품이다
- 천연물에는 생기,  야생의 힘,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 로얄젤리 먹으면 여왕벌처럼 오래 살게된다
- 야생을 먹으면 야생의 힘을 얻고, 해구신을 먹는 것이 정력에 좋다고 믿는다
- 내가 먹는 것이 내가 된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 물건 자체에 좋은 것(비타민) 나쁜 것(합성 첨가물)이 구분되어 있다고 믿는다


오랜 동안 산에 다닌 사람에게도 “산에 왜 가느냐?”는 질문은 세상을 왜 사느냐는 질문만큼이나 곤혹스럽게 느껴진다.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지만 산에 대한 열정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산이 거기 있어서 간다’는 선문답 같은 말은 이미 산에 왜 가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을 포기한 상태이다. 평생 동안을 산으로 달려가며 때로는 목숨마저 걸면서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마치 산이 잡아당기듯이 달려간다. 인간은 오랜 세월 문명을 발전시켜 왔고 오늘날 주거는 인간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편리함과 안락함을 준다. 그런데도 그 편리함을 떨쳐버리고 뛰어나가려고 한다.

하얀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 너른 수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으면 자유로움과 끝없는 해방과 낭만을 느낀다. 깊은 물은 위험한 곳이다. 바람이 거세지고 파도가 높아지면 언제라도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물가에서 물을 바라보기를 즐겨 한다. 집안에서 바다나 강, 또는 호숫물이 보이면 경치가 매우 좋다고 기뻐하며 집값도 다른 집에 비해 비싸진다. 완벽한 시설을 갖춘 집에 살면서도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뜨거운 물, 찬 물이 틀기만 하면 나오고 취사하기에 아주 편리하도록 전기나 가스 오븐이 스위치 하나로 작동이 된다.

해가 나는 좋은 날에는 먹을 것을 싸 들고 들로 산으로 달려간다. 어렵게 불을 피우고, 불편한 장소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기를 구어 먹기를 너무 좋아한다. 무엇을 먹어도 야외에서 둘러앉아 먹으면 다 맛있다고 한다. 밤이 되면 모닥불(캠프 파이어)을 지피고 둘러앉아, 상대의 얼굴에 넘실거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끝없는 희열에 젖는다. 어두움 속에 작은 불빛을 선호하고 대낮처럼 환한 곳에서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에서는 낚시를 하고, 숲에서는 사냥을 하며 즐거워한다. 이제는 생계수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진 일들을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구태여 다른 생물의 목숨을 빼앗는다. 시장에 나가면 원하는 거의 모든 식품을 구입할 수 있다.

그래도 바닷가에서 조개 몇 개를 주워도 즐거워하고, 숲 속에서 고사리를 따고, 송이버섯을 찾으려 소나무 밭을 헤매고 다닌다. 문명은 인간이 원하고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하루하루가 다를 만큼 빠른 속도로 고도의 문명을 이룩해 왔다. 더 많은 부를 쌓아 더 큰 집에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이 보이면서도 사실은 자연으로의 회귀본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이 먹으면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텃밭에 농사지으며, 개울물에 발을 담그며 살겠다고 염원하는 것이 현대인이다. 우리의 삶 속에 이와 같은 양면성을 지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생명과학자들에 의해 조금씩 덮개를 벗어내고 있다. 종래 인류의 출현을 약 200만 년 전으로 추정하던 것이 점점 더 늘어나서 지금은 약 5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현대 인류와 거의 다를 바가 없는 네안데르탈인의 경우는 약 15만 년 전에 전 유럽에 걸쳐서 주로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인류는 약 1만 년 전까지도 석기를 사용하며 사냥과 채취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진화는 수백만 년 동안을 지속해 왔고, 석기시대의 원시인에서부터 현대인 사이에는 생물학적으로 거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결론이다.

최근 <정장을 입은 사냥꾼>을 쓴 독일의 「유르겐 브라터」는 우리와 석기시대인이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은 수십만 년 전과 비교해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타고난 습성이나 감수성, 사물에 대한 반응을 보면 석기시대의 선조와 차이가 없다. 우리 몸의 전체적인 구조는 그들과 같고, 우리의 뇌는 그들의 뇌와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작동한다. 현대인은 그저 ‘양복을 입은 사냥꾼이며 채집자’인 것이다. 근본적으로 현대인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진화생물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미국의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저서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여러 가지 예를 통해 인간이 수렵채집 생활에 적응한 이후 지금까지 유전자 차원에서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으며 야생의 습성을 간직한 채 문명을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자연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동물로 생존하고 진화해 왔다. 문명이라는 옷을 입고 의젓하게 넥타이를 매고 앉아서 아무리 거드름을 피운다고 해도 역시 그 안에는 동물로서의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화 된 본능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해 온 유전자라는 프로그램을 내장한 채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통제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알게 되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찾기 위해서는 멀리 보아야 한다. 멀리 보기 위해서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고 시야가 확 터진 곳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음식점이나 회의장에서 벽을 마주보고 앉는 사람은 없다. 좁은 공간에 있으면 아주 불안해한다. 창을 내고 밖을 살펴야 편해진다. 어둠으로 멀리 볼 수 없으면 역시 불안하다.  불을 지피는 것을 좋아하고 고기 굽기를 즐겨 하는 것은 전형적인 사냥꾼의 습성이다. 아직도 촛불을 밝히고, 벽난로를 만들며, 불꽃놀이를 즐기는 것은 모두 다 오래 전부터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습성이다. 인간은 문명이라는 온실 속에 살면서 마치 동물원의 야생동물처럼 자연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연에서의 생존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는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으면 자연 상태의 야생에서 단 며칠 밤을 견디기가 힘든 불구자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육체 속에서는 여전히 자연 상태에서의 동물적인 본능이 생생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교류가능한 숫자 150명, 평균 77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의 수는 최대 5000명. 하지만 통계에 따르면 정작 사람들이 실제로 연락을 취하는 친구는 130명 정도에 불과하다. 진화론적으로 교류하는 사람의 수가 150명을 넘으면 인식의 한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최근 사람들이 각종 재난과 재해에 대해 위험과 공포감을 느끼는 정도에도 이 이론이 적용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일 막스플랑크 인간개발연구소의 미르타 갈레직 박사팀은 사람들이 가장 큰 공포심을 느끼는 사망자 수는 100명이며 그 이상의 숫자에는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미국 공공과학도서관회지(PLoS ONE) 최근호에 밝혔다.

연구팀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간 총 840여 명을 대상으로, 실험 참가자들에게 “우리 마을에 치명적인 질명이 발생했다면” 같은 재난 상황을 제시하고 10명, 100명, 1000명의 사망자마다 느끼는 공포도를 0~10까지 적도록 했다. 그 결과 사망자 수가 10명에서 100명으로 늘어날 때 공포도는 1.4 올라갔다. 하지만 100명에서 1000명으로 증가할 때는 공포도가 0.04 감소했다. 오히려 사망자 수가 100을 넘어가면 공포감이 줄어든 것이다. 실제로 실험참가자들에게 “가장 공포심을 느낄 때 사망자수는?”이라고 묻자 실험참가자들은 평균 100명이라고 답했다. 이는 실험 참가자들이 평소 활발히 교류하는 사람 수의 평균인 77명과 유사한 수치다.
이런 결과에 대해 연구진은 “사람들이 100과 1000의 차이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을에 일어난 일’이 강조되면 사람들이 느끼는 사망자 수를 평소에 내가 교류하는 집단의 크기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마을’이라는 단서가 사라지고 사망자가 10명, 100명, 1000명으로 늘자 사람들의 공포도도 계속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를 진화적으로 해석했다.
갈레직 박사는 “수렵채집 시절부터 인간들은 100명 정도의 집단을 이루고 사는 경향이 있었다”며 “100명이 죽으면 자기 집단의 구성원이 모두 없어진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100이라는 숫자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사망자가 100명이 넘게 발생한 사고를 알릴 때는 사망자수보다는 사고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페이스북       방명록      수정 2014-03-06 / 등록 2010-11-11 / 조회 : 25185 (284)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불량지식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  2009.12  최낙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