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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감각감각기관

감각인식 : 인지, 인식, 의식

- 감각세포, 감각기관
- 모방 : 미러뉴런
- 향료의 인식 기작
- 미각 메커니즘
- 감각의 통합
- 맛은 종합 과학이다
- 맛과 향의 상호작용



 

 




 


 


의식의 탐구

의식의 연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뭐가 가능한건지, 이런 연구가 종교라던가 자유의지 같은 것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코흐는 과학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일반독자는 좀 실망스럽겠지만 - 소박한 목표를 세운다. 그것은 바로 NCC(neuron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를 찾는 것이다.
NCC를 찾는 작업은 우리가 수천년전에 처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바로 뇌를 찾는 작업이다. 수천년전에는 머리안에 뇌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당시의 지식으로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이란 걸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유력한 답으로 등장한 것은 뇌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그들은 사람은 심장으로 생각한다고 믿었다. 큐피트가 사랑의 화살을 뇌가 아니라 심장에 쏘는 이유는 과거의 이런 역사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생각이란 것을 뇌가 한다는 것을 안다. 생각은 발이나 손이나 심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에도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다). 심장을 교체하거나 기계로 바꾸는 일도 있다. 생각이 뇌에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뇌에 질병이 생기면 그 사람의 사고가 엉망이 될거라는 것을 기대할수 있고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정신병의 원인을 뇌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정신병들은 아직 치료법이 찾아지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신경관련 질병이라고 부르고 신경계통을 연구하면 답을 찾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뇌를 찾았는데 NCC는 또 뭘까. 손이 아니라 뇌가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실험은 손을 자르는 것이다. 손이 없어도 나는 여전히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생각은 손이 아닌 몸의 특정부분에서 생기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NCC란 우리의 의식이 존재하는 곳이다. 우리의 뇌가 전부 의식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는 증거를 주로 시지각분야에서지만 코흐는 많이 보여준다.
의식의 연구는 인식의 연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지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게 아니라는 것을 즉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세상 그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 거듭해서 알게 되었다. 우리는 통상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눈이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다. 눈은 뇌의 일부다. 그런데 눈이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이 다르다. 이 표현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책은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여러가지 실험들을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착시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우리는 여러가지 시각적 착시현상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착시는 눈에서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보다 상위의 뇌 깊숙한곳 혹은 전두엽같은 뇌의 앞부분에서 생기는 것일까. 실험에 따르면 우리가 착시를 일으킬때도 우리의 망막에서 발생하는 신호 자체는 같다. 그러니까 착시는 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더 상위과정에서 생긴다. 코흐는 이러한 논증을 시상을 거쳐 초기시각피질(V1)까지 연장하여 우리의 후두부쪽에 있는 뇌의 한 부분인 V1이 보는 것은 우리의 인식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V1은 NCC의 일부가 아닌것이다.
의식과 외부세계와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실험에는 양안경쟁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두개의 눈에 각각 다른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상 우리는 두개의 눈으로 같은 것을 약간 다른 각도로 본다. 그런데 각각의 눈에 전혀 다른 신호를 넣어주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한눈에는 마차를 한눈에는 눈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두 그림을 중첩한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그림이 번갈아서 시간을 두고 보이게 된다. 즉 양쪽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고 같은 데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시간에 따라 바뀐다.
코흐는 신경계통이 하는 일을 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일과 단순 반사작용으로 움직이는 과정 혹은 좀비과정으로 나눠서 해석한다. 그래서 NCC가 켜지지 않을때 인간은 단순 반사작용을 하면서 의식없이 행동한다고 생각하며 의식을 가지고 있을때도 많은 일들이 좀비과정을 통해서 처리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그의 상상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거나 숨을 쉬거나 심장을 뛰게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일중에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일이 극히 일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연구는 바로 NCC를 찾아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코흐는 말하는 것이다. 뇌가 생각을 하는 부분이듯이 NCC가 의식을 가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뜻 들으면 NCC라는걸 쉽게 찾을 수 있을 것같지만 여전히 NCC는 애매한 상황이다. 쉬웠으면 코흐는 보다 간결하게 책을 쓸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코흐의 책은 답을 주는 책이라기 보다는 질문과 추측을 나열하는 책이다. 젊은 과학자들이 이분야에 뛰어들기를 기대하면서 쓴 책이다. 그 추측은 철학자의 추측처럼 근거없는 추측들은 아니지만 그대신에 세부사항은 엄청나게 많고 그것들이 해결되도 우리가 의식에 대해 뭘 배울수 있는지조차 아직은 희미하다.
NCC의 개념이 보자 확실해 진다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와 안가진 존재에 대해 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뇌가 없는 배추는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을 안다. 배추를 씹으면서 배추가 아파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NCC의 개념을 잘 알게 된다면 미래에는 NCC가 없는 생물들은 기계처럼 의식없이 좀비로 살아가는 존재이고 NCC가 있는 생물들은 의식이 있다고 믿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거나 원숭이 실험을 하는데 있어서 더 큰 윤리적 문제를 겪게 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직 인간만이 의식을 가질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차별적 장벽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모든 인간은 의식이 있고 인간이 아닌 것은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평등하고 동물들은 우리의 실험대상이 되거나 먹이가 되거나 해도 상관없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의식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의식에 1단계 2단계 100단계하는 식으로 단계가 있거나 의식의 양이 있다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가 배추도 의식이 있다고 믿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할때 그 의식이란 무엇인가를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한 상태냐에 대한 내용이 없다면 단순히 배추가 의식이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고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반대방향도 있을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눈을 뜨고 서로 대화를 하니까 모두 의식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식에 양이 있고 수준이 있다면 어떤 의미로 우리의 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깨어있고 우리의 일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도 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수 있을 것이다. 이것역시 섯불리 철학이나 종교적으로 해석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에 의미를 주는 문맥이고 그 문맥의 과학적 연구는 아직 나와 있지 않으니까.
코흐가 소개하는 연구결과들을 보면 깨어있다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뇌의 일부가 문제가 생겨서 시각의 특정분야가 칼러가 아니라 흑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컬러티브이의 화면 한쪽에 필터를 씌워놓은것처럼 괴상해 보이는 세상을 경험하지만 동시에 전혀 그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시각이 이상하다는 것을 별로 눈치채지 못한다.

이 세상에는 뇌의 절반이 잘려나가고도 생존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그 사람이 생존했다라고 표현하지만 이런 상태는 어떻게 말하면 뇌 혹은 지각의 상당부분이 잠자는 상태라고 말할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말하는 핵심은 그렇게 되도 그 당사자는 본인이 깨어있고 의식이 있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과연 멀쩡하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우리는 깨어있는 것일까? 모든 인간들은 같은 만큼 깨어있는 것일까?
코흐의 연구에 대해 한가지 이야기만 하고 이 감상문을 끝내도록하자. 과연 코흐가 진행하는 방향은 옳을까? 물론 누구도 모르고 코흐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는 지적해야 겠다. 코흐는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측정가능하고 만질수 있는 것에 관련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것은 그가 의식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들에 질렸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말만 할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진도를 나갈수 있는 것을 찾자라는 생각의 끝이 바로 NCC를 찾는 일을 하는 것이 된 듯하다.
그러나 이론과 실험 혹은 이론과 관찰은 서로 맞물려 있다. 실험없는 이론은 공허하지만 이론없는 실험은 불가능하다. 마치닭과 달걀처럼 양쪽은 서로는 서로를 요구하기에 항상 새로운 발전의 시작은 비약이 필요하다.
이 이야기를 구체화하기 위해 뉴튼의 중력법칙을 생각해 보자. 물건들이 서로를 당긴다는 사실, 예를 들어 지구가 사과를 당긴다는 사실은 사과를 떨어뜨려보면 안다. 그럼 사과를 당기는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이 그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언뜻 생각하면 이것이 지당한 질문같다. 그런데 뉴튼의 천재성은 바로 그 지당한 질문을 피해간 것이다. 뉴튼의 중력법칙은 중력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냥 중력은 있는데 그 중력이 이러저러한 법칙을 따른다는 선언일 뿐이다. 왜 그런가? 모른다. 설명하지 않는다.
당연해 보이는 질문을 거부하고 법칙을 선언하는 것은 비약이고 터무니 없는 생각같지만 뉴튼이래의 과학발전은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 왜 혹은 뭐가 중력을 만드는 가를 고민했기에 뉴튼 역학같은 것을 발전시킬수가 없었다.
의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끝없이 의식이 어디서 생기나, 왜 생기나를 물으면 우리는 그저 제자리를 맴돌고 큰 진전은 이루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의식이 어느 장소에 있는 기관에서 생기는가를 찾는 질문보다 의식이 만족하는 법칙을 상상하는 일이 의식의 이해에 대한 더 결정적인 발전의 계기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당연한 것이고 코흐가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겠지만 코흐가 제안하는 의식의 연구방식이 의식을 연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는 없다.  다른 것들이 황당해 보여도 그것들이 왜 필요한가를 잊지 않고 의식을 보다 큰 문맥에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감각의 흐름

제프 호킨스는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각은 시간적 패턴에도 의존한다. 그 말은 눈으로 들어오는 패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각의 공간적 측면은 직관적으로 명백한 반면에, 시간적 측면은 덜 뚜렷하다. 초당 약 세 번씩 당신의 눈은 신속운동(saccade)이라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일으킨다. 한 지점을 주시했다가, 갑작스럽게 다른 지점을 주시한다. 눈이 움직일 때마다 망막에 맺히는 영상은 달라진다.
이것은 당신의 뇌로 전달되는 패턴도 신속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변함이 없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가장 단순한 상황에서도 그렇다. 실생활에서 당신은 머리와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속을 돌아다닌다. 당신은 세상이 시선으로 계속 쉽게 쫓을 수 있는 대상들과 사람들로 가득한 안정적인 곳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뇌가 망막에 맺힌 비슷하지만 결코 똑같지 않은 수많은 상들을 다룰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시각은 뇌로 강물처럼 흘러 들어오는 패턴들이다. 시각은 그림이 아니라 노래에 더 가깝다.
많은 시각 연구자들은 신속운동과 급속히 변화하는 시각 패턴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동물들을 마취시킨 뒤 의식이 없는 그 동물이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시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연구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시간 차원을 제거하는 셈이다. 원칙적으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변수를 제거하는 것은 과학적 방법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럼으로써 시각의 핵심 요소 중 하나, 사실상 시각을 형성하는 것을 내버리는 셈이다. 시각을 신경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시간을 중심에놓아야 한다.

한편 청각을 다룰 때에는 우리는 소리의 시간적 측면을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소리, 말, 음악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명백하다. 우리는 발음된 문장 전체를 동시다발로 들을 수 없듯이, 노래 한 곡을 동시다발로 들을 수 없다. 노래는 시간이 흐를때에야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소리를 공간적 패턴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각의 역전된 사례인 셈이다.
시간 측면은 즉시 명확히 파악되지만, 공간 측면은 덜 뚜렷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청각도 공간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당신의 양쪽 귀 안에 든 나선형의 달팽이관을 통해 소리를 활동 전위로 바꾼다. 관자뼈라는 몸에서 가장 단단한 뼈 속에 들어 있는 작고 불투명한 소용돌이 모양의 달팽이관은 반세기 전에 헝가리 물리학자 게오르그 본 베크세이가 밝혀낸 것이다. 본 베크세이는 속귀의 모형을 만들던 중, 듣는 소리의 각 성분이 달팽이관의 각기 다른 부분을 떨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높은 진동수의 음은 달팽이관의 딱딱한 바닥 쪽을 떨게 한다. 낮은 진동수의 음은 더 나긋나긋하고 폭이 넓은 바깥쪽 부분을 떨게 한다. 중간 진동수의 음은 중간 부분을 진동시킨다. 달팽이관의 각 부위에는 뉴런들이 붙어 있어서, 그 부분이 떨릴 때 신경흥분을 일으킨다. 일상생활에서 당신의 달팽이관들은 끊임없이 동시에 들리는 수많은 진동수들의 소리에 떨리고 있다. 따라서 매순간 달팽이관 전체에 걸쳐 새로운 공간적인 흥분 패턴이 만들어진다. 매순간 새로운 공간적 패턴이 청신경을 따라 올라간다. 즉 이 감각 정보도 시간적 및 공간적 패턴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대개 촉각을 시간적인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촉각은 공간적인 것만큼 시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직접 실험을 통해 알아 볼 수 있다. 친구에게 손바닥을 위로 향해 펴고 눈을 감으라고 하자. 그 손바닥에 반지나 지우개 같은 작은 일상용품을 올려놓고, 손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무엇인지 알아맞히라고 하자. 그는 무게와 아마도 전체적인 크기 외에는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눈은 그대로 감은 채, 손가락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해보라. 그러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다. 손가락을 움직이도록 함으로써, 당신의 촉각 인식에 시간을 덧붙인 것이다. 망막의 중앙에 있는 황반과 손가락 끝은 고도로 예민하다는 점에서 서로 좋은 비유 대상이다. 마찬가지로 촉각은 노래와 같다. 셔츠 단추를 잠그거나 어둠 속에서 문을 잠그는 것처럼 촉각을 복잡하게 사용하는 능력은 촉감의 연속적인 시간별 패턴 변화에 의존한다.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니얼 데닛 저/유자화 역/장대익 감수 | 옥당 | 원서 : Consciousness Explained


세계적 석학 대니얼 데닛, 마음과 뇌의 수수께끼를 풀다!
인간의 의식을 전면적으로 탐색한 기념비적인 역작!

성서에서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을 기적이요, 신비라고 묘사한다. 대니얼 데닛Daniel C. Dennett은 기존 철학계도 인공지능, 지향성, 의식, 그리고 자유의지를 논할 때 그와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해왔다. ‘로봇이 인공지능을 진짜로 가질 수 있는가? 의식을 가진 로봇이 가능한가?’라는 식의 물음을 던지면서 암암리에 인간의 지능과 의식 등을 신비화 혹은 차별화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Consciousness Explained》에서 의식에 관한 철학자들의 통념을 비판하고, 의식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제시한다. 그가 비판하는 통념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심리 상태의 다른 모든 속성과 명확히 구분되면서 분명히 파악되는 ‘감각질qualia(느껴진 질적 속성 같은 것)’이 의식이라는 생각이다. 둘째, 영화를 감상하듯 객석 한가운데에 앉아 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찰하고 통제하는 작은 존재 같은 것이 바로 의식이라는 생각이다. 데닛은 이를 의식의 ‘데카르트 극장Cartesian Theater’ 모형이라고 칭하고, 데카르트 이후 의식에 관한 입장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강하게 비판한다.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는 그가 신경생물학자, 인지심리학자, 인공지능 학자와 수년 동안 교류하고 협력한 최고의 결과물로, 인간의 의식을 전면적으로 탐구하고, 의식에 대한 새롭고 획기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책이다.

전통적인 의식 이론, 무엇이 문제인가?

데닛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인 데카르트의 이원론으로 이 책을 시작한 다음 그것을 해체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가지 실체로 되어 있고, 비물질적 실체인 정신은 뇌에 있는 송과선을 통해 물질적 실체인 육체와 상호작용한다. 데카르트는 그곳을 이해와 의식이 일어나는 뇌의 중추로 보았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 극장’ 모형이다.
데닛은 데카르트 극장 모형이 잘못된 이원론을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원론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 둘이 만나는 지점이 어딘가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 극장에서도 물리적 과정을 거쳐 전달된 감각적 입력 신호들이 모이고 통합되어 상영되는 내적 자아의 장소가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뇌에는 그러한 지정된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데닛의 주장이다.
지금까지 데카르트 극장 모형을 믿는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철학자가 ‘의식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라는 생각을 고수했다. 그들은 왜 의식을 과학(3인칭 시점)이 접근할 수 없고, 객관적 표현이 불가능하며, 데카르트 극장에서 생겨나는 1인칭적 대상으로 인식해온 것일까? 데닛은 한마디로 그것은 ‘착각 때문’이라고 말한다. 화폭에 찍혀 있는 점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아무리 보아도 그림의 전체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메커니즘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의식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점에서 벗어나 시각을 면의 수준으로 넓히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의식을 마치 1인칭적 질적 속성인 것처럼 느끼는 것은 지향적 수준에서는 뇌의 메커니즘 간의 협력이 상당히 일관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관적 의식이 실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 것이다.

의식을 설명하는 새로운 시각, ‘다중원고’ 모형과 ‘타자현상학’

데닛의 ‘다중원고Multiple Drafts’ 모형은 그토록 많은 사람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데카르트 극장 모형을 대체하기 위해 그가 꺼내 든 카드다. 이 모형에 따르면, 의식이 발생하는 자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뇌의 모든 정신 활동은 감각 입력이 병렬적으로 처리되고 해석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는 신경계로 들어오면서부터 연속적으로 편집되고 수정된다. 우리가 실제로 의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그 의식이 맨 처음 생겨난 곳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 참조해야 할 표준적인 의식의 흐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속 편집 중인 수많은 원고가 존재할 뿐이다. 이런 흐름에서는 조사하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른 결과,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다중원고 모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의식의 흐름이라고 공인된 단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후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정신 작용이 통합되는 그런 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뇌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메커니즘 속에 분산되어 있다.
시각 처리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커다란 원이 반짝이는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이때 화면에서 나온 빛은 먼저 망막에 닿을 것이다. 이 순간 분명히 그는 빛을 의식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다음 순간, 빛은 망막의 시신경에 도달하고, 시신경은 빛을 전기 신호로 바꾼다. 이 순간에 빛은 의식되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다음, 시신경이 보낸 전기 신호는 시각 정보 처리를 담당하는 1차 시각피질(V1)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빛은 의식되지 않는다. 결국 여러 시각적 처리가 행해진 뒤에야 그 시각 신호가 무엇인지 의식된다고 할 수 있다. 시각 신호가 처리된 뒤에 우리 뇌는 그 신호를 기억으로 바꾸며, 우리는 회상을 통해 이후에 그 빛을 다시 의식할 수 있다.
데닛은 우리 뇌가 다양한 메커니즘을 통해 동시에 분산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이 발생한 순간과 공간을 콕 짚어서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대 인지과학의 연구 성과를 제시하면서 우리의 정신 현상이 이런 다양한 메커니즘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감각질의 존재를 전제하고 의식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현대 철학자들이 현대의 뇌과학적 성과를 무시한 채 여전히 데카르트적 시각에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데닛은 데카르트적 유물론을 반박하는 동시에 의식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라는 생각에 도전한다. 의식이 복잡하고 경이로운 현상임은 틀림없지만, 신비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마치 마술을 속속들이 알고 나면 그것이 더 이상 마술이 아닌 것처럼, 뇌의 신경화학적 작용으로 어떻게 의식이 일어나는지 알고 보면 의식도 결코 신비로울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데닛은 인간의 의식에 접근하려면 과학적 접근 방법인 ‘타자현상학heterophenomenology’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의식에 관해 말할 때 보통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여겨지는 것일 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의식은 의식의 증거가 아니라 이론가의 허구로 보아야한다는 얘기다. 마음을 자기 성찰하듯 관찰하지 말고, 자연현상을 관찰하듯 3인칭 시점으로 접근하는 타자현상학이야말로 주관적인 의식을 객관적ㆍ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의식 현상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그는 이 책에서 의식에 관해,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현상에 관해 설명한다.
1부에서는 의식의 문제를 조사하고, 몇 가지 방법론을 수립한다. 2부에서는 의식의 새로운 모형인 다중원고 모형을 소개하고, 이 모형이 마음에 관한 우리의 생각과, 인지과학 여러 분야에서 나온 다른 연구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왜 기존의 데카르트 극장 모형이 아니라 이 모형을 선택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또한 언어가 인간의 의식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진화의 세 번째 수단인 밈이 뇌와 의식의 발달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3부에서는 새로운 대안 모형에 쏟아지는 반대 의견에 답하며 이 모형이 함의하는 것을 샅샅이 살펴본다. 현상학의 특성, 자기 성찰의 본질, 경험적 상태의 질(혹은 감각질), 자아의 본질,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의 의식에 관한 문제까지 폭넓게 다룬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는 과학적 사실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 비유, 사고 실험, 그리고 다양한 기타 장치들을 제공한다. 그 모든 것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새로운 시각을 갖고, 구태의연한 사고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또 지금껏 믿어왔던 의식에 관한 전통적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단일하고 일관성 있는 시각으로 사실들을 체계화하도록 도울 것이다.
그의 삶과 학문적 방법은 철학자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그는 자신의 분야(심리철학, 인지과학 철학, 생물철학)에서 최고의 전문가이면서도 전문가들만을 상대로 글을 쓰는 ‘강단 철학자’가 아니다. 그의 저서는 동료 철학자들의 뇌를 자극하는 책인 동시에 교양 있는 대중을 지금도 매료하고 있는 베스트셀러다. 이는 그가 철학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징표다. 그의 글에는 언제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적절한 예제, 그럴듯한 비유, 고품격 농담 등이 넘쳐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가 책 말미에 철학자와 과학자를 위한 부록 두 편을 마련해, 자신의 주장에 제기될만한 의문에 관해 미리 입장을 정리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식에 관한 그의 선구적인 주장과 연구는 계속된다!

최근에 데닛은 의식을 다중원고에 비유하는 방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명성’에 비유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 명성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뇌에서 의식이 발생하는 과정 역시 정확한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경쟁하여 그중 소수만이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을 구성하는 다양한 메커니즘도 우리 몸의 지배권을 놓고 실제로 경쟁을 펼친다. 이 경쟁에서 승리한 메커니즘이 ‘의식’이라는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승리를 쟁취한 메커니즘이 데카르트 극장의 객석 한가운데에 앉아 모든 것을 통제하던 작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세계는 군주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가깝다. 각 메커니즘은 다른 것들과의 네트워크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가 의식을 차지하는 기간은 길지 않으며, 각각의 메커니즘은 수시로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든다. 그리고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이될 때 그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다.
의식에 관한 그의 선구적인 주장과 혁신적인 이론은 그가 지난 40여 년 동안 수많은 과학적 성과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연구의 지평을 넓혀가면서 얻어낸 것이며, 지금도 그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의식에 관해서는 여전히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고, 다양한 이론들이 대두되고 있으며, 그의 이론이 이 논쟁의 장을 더욱 흥미롭고 의미 있는 최전선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대표작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가 의식을 이해하는 훌륭한 시발점이자 모든 연구의 바탕이 될 것은 분명하다.

 


페이스북       방명록      수정 2016-01-06 / 등록 2010-02-11 / 조회 : 12056 (130)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불량지식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  2009.12  최낙언